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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군(朝鮮四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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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 나라가 조선(朝鮮) 땅을 빼앗아 사군(四郡)을 만들었으니, 사군은 본디 우리나라에 속한 것이다. 위(魏) 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현도(玄菟)에서 나와 고구려를 침범하자 왕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위 나라 장수가 숙신(肅愼) 남쪽 경계까지 추격하여 돌에 공적을 새겨 기록했다. 또 환도(丸都)를 무찌르고, 불내성(不耐城)에다 공적을 새기고서 낙랑으로부터 물러갔다. 환도는 국내성(國內城)인데,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겼으니, 평양은 왕검성(王儉城)이다. 환도는 압록강 서쪽에 있는데, 현도로부터 나와 낙랑으로부터 물러갔으니, 두 군(郡)이 요동(遼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고(通考)》에, “조선은 진번(眞番)을 역속(役屬 복속)시켰다.” 했으며, 또, “우거(右渠)가 들어와 천자(天子)께 뵈오려 하면서도 일찍이 진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했으니 진번이 한(漢) 나라로 들어가는 경계(境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隋) 나라의 동정(東征)에 있어,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오고,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나오고,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오고,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菟道)로 나오고,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오고,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오고,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오고,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와서 모두 압록수(鴨綠水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 《통고(通考)》에 본다면, 수성 증지는 낙랑군의 속현(屬縣)이고, 양평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했으니, 이는 모두 압록 이동(以東)과 상관없다. 다만 임둔(臨屯)은 기록에 보이는 것이 없다.
내 생각으로 미루어 본다면 낙랑군치(樂浪郡治)는 조선현(朝鮮縣)이니 그 읍거(邑居)가 비록 요동에 있었지만, 평양에서 서쪽 지방은 모두 그 속현(屬縣)이었다. 현도군치 옥저성(沃沮城)은 설세웅이 나온 길로서 반드시 그 이름이 있지만, 우리나라 동북(東北)의 옥저는 아니다. 진번군치 삽현(霅縣)은 수(隋) 나라 군대의 동쪽으로 나온 아홉 길 안에 들어 있지 않으니 요하(遼河)의 서쪽으로서 중국 본토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한 소제(漢昭帝) 때에 이르러 사군(四郡)을 합쳐서 둘로 만들었는데, 평나(平那)가 있을 뿐 진번이 없으니, 진번이 바로 평나군(平那郡)인 것이다. 오직 임둔군치인 동이현(東暆縣)을 우리나라 사람이 지금의 강릉부(江陵府)로 지칭(指稱)하고 있으나 반드시 확실하다고 볼 수 없다. 이 한 부(府)는 패강(浿江)의 동남쪽 지방과 강원도 내부 예맥(濊貊)의 서쪽 지방이 모두였으니, 혹시 당시에 강릉에 수부(首府)를 두었는지도 모른다.한 소제 때 사군을 고쳐 이부(二府)로 만들어서 임둔을 낙랑에 합쳤으니 이부가 된 후로는 압록강 밖과 임둔 지방을 통틀어서 낙랑이라고 일컬었다. 지금의 평안ㆍ강원 두 도(道)가 모두 낙랑의 지경(地鏡) 안이었다.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이르러, 평안도가 고구려에게 점령당해 낙랑주(樂浪主)는 백제(百濟)의 동쪽, 예맥(濊貊)의 서쪽으로 물러가 있게 되니, 그 압록강 서쪽에 있던 땅은 중국의 군현으로 들어갔으므로 태수(太守)라 일컫고, 주(主)라 일컫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밝힐 수 있는가? 처음에 백제왕이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다.” 했으며, 또 예맥은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렀으니, 예맥과 백제 두 나라 틈에 끼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에 쫓겨서 강원도에 물러와 있을 때이다.
그 후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때 중국의 요동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약탈해 가지고 돌아왔다.동천왕(東川王) 때에 위(魏) 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함께 현도(玄菟)로부터 나와 고구려를 침입했는데, 이는 고구려에게 멸망당하여 압록강 밖으로 도망해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다만 이때에 백제가 낙랑의 공허(空虛)함을 틈타 이를 습격하여 변경(邊境)의 백성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유무가 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의 지경을 넘어서 요동을 습격했을 리는 없었던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이 전역(戰役)은 낙랑이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하여 관구검을 이끌고 와서 공격하니 고구려의 왕이 바닷가로 달아났으므로 이에 낙랑이 그 옛땅을 회복하게 되고 백제가 그 공허함을 틈타서 백성을 약탈해 간 것일 것이다. 여기에서 ‘낙랑’이라고 말한 것은 여왕(麗王)이 멀리 달아나고, 옛 주인이 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여왕이 유유(紐由)의 계교를 써서 위 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그 나라를 회복하니, 유무도 또한 요동의 고을로 돌아갔다. 또 생각건대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했을 때는 한(漢) 나라 건무(建武) 13년이다. 건무 20년에 이르러 한 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서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만들었으니 살수(薩水) 이북이 모두 한 나라에 속했다. 이때에 고구려가 비록 낙랑의 터전을 차지했었지만, 국도는 아직도 압록강 서쪽에 있었으며, 낙랑주(樂浪主)가 비록 요동에 도망가 있어서 옛 땅과 격절되고, 또 고구려가 그 사이에 가로막고 있었지만, 한 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서 영지(領地)를 회복했던 것이다. 이 전역은 낙랑의 옛 땅을 친 것이고, 낙랑주를 친 것은 아니니 실지에 있어 고구려를 친 것이다. 낙랑은 이미 멸망한 지 오래인데, 또 누구를 치겠는가? 일일이 교감하여 귀결을 밝힌다. 후일에 태사씨(太史氏)로서 낙랑세가(樂浪世家)를 짓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여기에서 취할 것이 있을 것이다. 살수는 곧 청천강(淸川江)이다.

[주C-001]조선사군(朝鮮四郡) : 서기전 108년 한 무제(漢武帝)가 위만 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현도(玄菟)ㆍ진번(眞番)의 사군(四郡)을 두었음. 성호(星湖)는 조선사군(朝鮮四郡)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지만, 흔히 한사군(漢四郡)이라는 말로 표현됨. 사군 설치 당초의 위치 및 강역(疆域)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음. 여기에서 성호(星湖)는 역사의 기록을 고증(考證)으로 들고, 또 개인적인 견해(見解)도 덧붙여서 사군의 위치와 그 변천을 논했음. 《類選》 卷1下 天地篇下 地理門.
[주D-001]관구검(毌丘儉) : 위(魏) 나라의 유주 자사(幽州刺史)로 있으면서 서기 246년에 고구려에 침입했음. 《三國志 魏書 毌丘儉列傳,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東川王》
[주D-002]숙신(肅愼) : 고조선 시대에 만주 동쪽에 있던 부족. 뒤에 읍루(挹婁)ㆍ말갈(靺鞨) 등으로 일컬어졌음. 여진족의 먼 조상이 됨.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挹婁 古肅愼氏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 南與北沃沮接 不知其北所極”이라고 했으며, 《위서(魏書)》 동이열전에 “挹婁 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이라고 했음.
[주D-003]돌에 공적을 새겨 기록했다 : 이 말은 관구검이 환도(丸都)를 점령한 기념으로 불내성에 비석을 세운 것을 이름.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가 1906년 만주 봉천성(奉天省) 즙안현(輯安縣) 판석령(板石嶺)에서 발견되었음.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 五復遣寇 六年五月旋 討寇將軍衛烏桓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이라는 여섯 줄만을 알아볼 수 있음. 《朝鮮金石考》
[주D-004]불내성(不耐城) : 성(城) 이름. 우리나라 함흥(咸興)의 북쪽에 있었음. 한(漢) 나라 때 불이현(不而縣)임. 《한서(漢書)》 지리지 하(地理志下)에, “樂浪郡 縣二十五不而”로 되어 있으며, 《독사방여기요(讀書方輿紀要)》 산동(山東) 외국부고 조선(外國附考 朝鮮)에, “不而城在咸興府北 漢縣屬樂浪郡 東部都尉治此 後漢廢 魏正始中幽州刺史毌丘儉 擊高句麗 屠丸都 銘不耐城 卽此 耐 而通”이라고 했음.
[주D-005]국내성(國內城) : 이 성 위치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만주 즙안현(輯安縣) 통구(通溝) 부근으로 보는 견해가 많음. 또 고구려의 두 번째 서울을 국내성. 세 번째 서울을 환도성으로 보아서 국내성과 환도성을 별개로 보는 견해와 환도성을 국내성의 산성(山城)으로 보아서 같은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현재로서는 후자(後者)가 지배적임. 성호(星湖)도 여기에서 같은 지역임을 논했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조에, “22년 겨울 10월 도읍을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二十二年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고 해서 졸본(卒本)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일을 밝히고 있으나, 산상왕(山上王)조에는, “2년 봄 2월에 환도성을 쌓았다[二年春二月 築丸都城].” 했을 뿐,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은 없음. 동천왕(東川王)조에, “21년 봄, 왕이 환도성이 난리를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다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 사직을 옮겼다[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했고, 장수왕(長壽王)조에는, “15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十五年 移都平壤].”고 해서 다시 도읍을 옮긴 사실을 밝히고 있음. 《당서(唐書)》 지리지(地理志)에, “自鴨綠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泝流 東北三十里 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泝流五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라고 하여 확실치는 않으나 대략의 위치를 말하고 있음.
[주D-006]현도로부터 …… 물러갔으니 : 이 말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조에, “二十年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毌丘儉 將萬人出玄菟來侵……逐自樂浪而退”라는 기록이 보임.
[주D-007]두 군(郡)이 요동(遼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말은 《자치통감(資治通鑑)》 한기(漢紀) 13, 세종 효무 황제(世宗孝武皇帝) 하지상에, “遂定朝鮮 爲樂浪臨屯眞番玄菟四郡”이라고 했으며, 그 주(注)에, ‘현도군은 본디 고구려이다. 이미 조선을 평정하고서 군을 두었으니, 군치는 옥저성이다. 뒤에 이맥의 침범하는 바 되어 군을 구려의 서북으로 옮겼다[玄菟郡本高句驪也 旣平朝鮮 倂開爲郡 治沃沮城 後爲夷貊所侵 徒郡句驪西北].’고 했음.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동옥저(東沃沮)에, “옥저성을 현도군치로 만들었다[以沃沮城爲玄菟郡].” 한 주에, ‘沃沮城 今咸興府也’했음. 또 《한서》 지리지에는 고구려(高句驪)ㆍ상은대(上殷臺)ㆍ서개마(西蓋馬)가 현도군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음. 여러 가지 설로 보아 현도는 처음에 만주 동가강(佟佳江) 유역의 고구려가 발흉한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서쪽은 요동군에 접하고, 동쪽은 옥저(沃沮)에 걸쳐 있었고, 뒤에 지방민의 압박으로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간 것 같음. 이런 점에서 성호의 현도 요동설(玄菟遼東說)이 수긍됨. 《자치통감》 한기(漢紀) 13, 세종 하지상(世宗 下之上)에, “遂定朝鮮 爲樂浪臨屯玄菟眞番四郡”주에 ‘낙랑군치는 조선현이니, 우거가 도읍했던 곳을 치소로 삼은 것이다[樂浪郡治朝鮮縣 蓋以右渠所都爲治所也].’ 해서 조선현의 위치를 평양으로 보고 있음. 또 평양의 대안(對岸)인 토성리(土城里)에서 낙랑군치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해서 토성리를 군치로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평양을 군치(郡治)의 소개(所在)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임. 이 글 뒤에 나오는 “낙랑군치는 조선현으로서 그 읍거가 비록 요동에 있었지만, 평양에서 서쪽이 모두 그 속현이었다[樂浪郡治朝鮮縣 則其邑居 雖在遼東而平壤以西 皆共屬縣也].”는 말은 성호의 추측일 뿐, 문헌(文獻) 위에서 그 고증(考證)을 찾아볼 수 없음. “현도로부터 나오고, 낙랑으로부터 물러갔다.”는 기록은 해석 여하에 따라서 의미를 달리할 수도 있음. 낙랑군의 일부 현(縣)이 요동에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 중심은 평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함 따라서 낙랑 요동설(樂浪遼東說)은 애매한 것임.
[주D-008]《통고(通考)》 : 《문헌통고》를 이름. 원 나라 때 마단림(馬端臨)이 편찬한 전부고(田賦考)를 비롯해서 24부문(部門) 348권으로 되어 있음.
[주D-009]조선은 진번(眞番)을 역속(役屬 복속)시켰다 : 이 말은 진번이 조선에 예속되었음을 이름.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儉”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위만(衛滿)이 진번을 복속시킨 일을 밝히고 있음. 진번군은 이 진번(眞番) 옛 땅에 설치된 것임.
[주D-010]진번이 한(漢) 나라로 …… 알 수 있다 : 이 말은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요동태수가 위만(衛滿)을 외신(外臣)으로 삼아 새외(塞外)의 오랑캐들이 병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할 것과 오랑캐 군장이 천자를 들어와 뵈려 하면 이를 금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이를 천자께 아뢰니, 상께서 이를 허락했다.……아들에게 전하여 손자 우거에 이르러서 유인(誘引)한 한 나라 도망민이 심히 많아졌으며, 또 일찍이 천자께 들어가 뵙지 아니하였다. 진번ㆍ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께 뵈려 하면 또 이를 가로막아서 통하지 못하게 했다[遠東太守 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毋使盜邊蠻夷君長 欲入見天子 勿得禁止以聞 上許之……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辰國欲上書 見不子 又雍閼石通].”고 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 한기(漢紀) 권 13 세종 하지상(世宗 下之上)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있음. 《문헌통고》의 기사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旣未嘗入이라고 해서 ‘見’ 자가 빠져 있음. 성호의 《통고》인용(引用)은 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고, 또 문구의 해석에 있어서도 “이미 일찍이 들어오지 아니하였다[旣未嘗入].”로 끊고, 진번은 그 다음 말에 연결시켜야 옳다. 진번이 한 나라로 들어가는 경계에 있었다는 성호 자신의 주장을 살리기 위한 무리한 해석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럴 경우에도 원문에다 ‘不’ 자를 넣어서 “이미 일찍이 진번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旣未嘗不入眞番].”라고 해야만 뜻이 통한다. 진번군은 서기전 82년 폐합(廢合)되어, 그 존속 기간이 극히 짧았고, 또 사서(史書)에도 그 위치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음.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는 설과 남쪽에 있었다는 설이 대립되고 있음. 성호는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에 따라서 압록강 서북쪽에 있었음을 주장하고, 특히 진번군치인 삽현(霅縣)은 요서(遼西)에 있었다고 논했음.
[주D-011]수(隋) 나라의 동정(東征) : 이 말은 《자치통감》 수기(隋記) 양제 상지하(煬帝 上之下)에 보임.
[주D-012]갈석도(碣石道) : 갈석은 산 이름으로 풀이됨. 《자치통감》수기(隋紀) 양제 상지하(煬帝 上之下)의 주에, 두우(杜佑)가, “갈석산은 한 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니, 진(秦) 나라의 만리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碣石山 在漢樂浪郡遂城縣 秦長城起於此山].” 했음.
[주D-013]사군(四郡)을 합쳐서 둘로 만들었는데 : 이 말은 《한서(漢書)》 소제본기(昭帝本紀)에, “시원 5년 여름에 담이ㆍ진번군을 파했다[始元五年 罷儋耳眞番郡].”는 기록이 보임. 담이는 중국 남쪽 남월(南越)에 있었던 군(郡) 이름임. 그리고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소제 시원 5년에 이르러 임둔ㆍ진번을 파하여 낙랑ㆍ현도에 합병시켰다.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겼다[至昭帝始元五年 以臨屯眞番 呂倂樂浪玄菟 玄菟徙居句驪].” 했음. 4군을 합쳐서 둘로 만든 것임.
[주D-014]평나군(平那郡) : 한 소제 시원 5년에 진번군을 파했으니, 진번군이 없어진 것은 사실임. 평나군이라는 명칭이 어느 기록에서 나왔는지 출처가 고증되지 않음.
[주D-015]이 한 부(府)는 …… 두었는지도 모른다 : 이 말은 《위서》 동이전 예(濊)에, “단단대령에서 서쪽은 낙랑군에 속하고, 동쪽 일곱 현(縣)은 도위(都尉)가 이를 맡아 다스렸다[自單單大嶺以西 屬樂浪 以東七縣 都尉主之].”는 기록이 보이고, 그 주에, ‘임둔군치 동이현은 예의 땅에 있었다. 처음에 창해군을 만들었으나 뒤에 다시 임둔군을 만들었으니, 지금의 강릉이 실로 동이현이다[臨屯郡治東暆縣 知濊地 初之爲蒼海郡 後重立爲臨屯而今之江陵府 實東暆縣也].’ 했음. 성호의 패강(浿江)의 동남과 강원도 일대를 임둔군으로 보고, 임둔군치인 동이현의 소재지를 강릉으로 인정하는 것은 모두 이같은 기록에 근거를 둔 것임.
[주D-016]…… 주(主)라 일컫지 않은 것이다 :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 주(主)라 일컫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은, 낙랑군이 우리나라 안에 있을 때에는 낙랑주(樂浪主)라고 일컬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물러가고, 압록강 서쪽의 남은 고을들이 중국 군현 속에 들어간 뒤에는 낙랑태수(樂浪太守)로 일컬어진 까닭을 밝힌 것으로 보임. 그러나 주로 일컬어지고, 태수로 일컬어진 명확한 한계를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음.
[주D-017]나라의 동쪽에는 …… 말갈(靺鞨)이 있다 : 이 말은 《삼국사기》 백제본기(百齊本紀) 시조 온조왕(始祖溫祚王) 조에 보임.
[주D-018]예맥 : 이 말은 《후한서》 동이전(東夷傳) 예(濊)에 보임.
[주D-019]중국의 요동을 …… 가지고 돌아왔다 : 이 말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太祖王) 94년 조에 “秋八月 王遺將 襲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姻子”라는 기록이 보임.
[주D-020]백제가 낙랑의 …… 노했다고 한다 : 이 말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古爾王) 13년 조에, “왕이 공허(空虛)함을 틈타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보내서 낙랑을 습격하여 변민을 빼앗아 왔다. 무(茂)가 이를 듣고 노했다. 왕이 침경를 두려워하여 그 백성을 돌려보냈다[王乘虛遺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고 보임.
[주D-021]유유(紐由)의 계교 : 이 말은 유유(紐由)가 동천왕(東川王)에게 “사세가 심히 급박해졌습니다. 헛된 죽음을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魏) 나라 군대를 호궤(犒饋)하고, 틈을 노려서 그들의 장수를 죽이겠습니다. 신의 계교가 이루어지거든 왕께서는 분발하시어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십시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했다. 유유가 위 나라 진영으로 가서 항복을 청하고 칼을 식기(食器) 속에 감추어 가지고 적장 앞으로 다가가서 적장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죽었음. 위 나라 군대가 혼란에 빠지니, 왕이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맹렬하게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음. 위 나라 군대는 마침내 낙랑으로부터 물러간 것을 이름인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조에 보임.
[주D-022]대무신왕(大武神王)이 낙랑을 습격하여 : 이 말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조에,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했다[二十年 王 襲樂浪濊之].”는 기록이 보임. 건무(建武)는 후한(後漢) 세조(世祖) 때 연호임. 건무 13년은 서기 37년임.
[주D-023]고구려가 …… 있었지만 : 이 말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조에, “27년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서 낙랑을 쳤다.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만들었으니, 살수이남이 한 나라에 속했다[二十七年 漢光武帝 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고 보임. 성호는 살수 이북을 말했는데, 기록에는 살수 이남으로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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