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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사설 제14권 Edition of Original Text  Image of Original Text  Open Wind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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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문(人事門)
소관 봉박(小官俸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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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게 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억조창생은 한 사람이 홀로 다스릴 바 아니므로 반드시 수령에게 명하여서 다스리게 해야 되는 것이니, 수령이 궁핍하고서 백성만이 부유할 수 있겠는가? 만약 수령이 청렴하기를 바란다면 모름지기 녹봉을 넉넉히 주어야 할 것이다. 녹봉을 넉넉히 주어도 탐학(貪虐)이 있을까 염려되거든, 하물며 존귀한 자리에 있으면서 재용(財用)이 궁핍할 수가 있겠는가?
주(周) 나라 제도에서 녹봉을 배정함에 있어, 상사(上士)상사(上士)는 중사(中士)보다 배가 되고 중사는 하사(下士)보다 배가 되게 하였다. 상사는 하사에 비해 이미 4배가 되는데, 하물며 대부(大夫)는 상사에 비해 배가 됨에랴? 임금도 대부에 비하여 40배에 지나지 않았으니, 위는 박하고 아래는 넉넉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나라의 부세(賦稅)로써 이에 충당한다면 어찌 부족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사치는 날로 더하고 재물은 위로 몰려 욕심을 마음껏 채운 후에 그 나머지로써 여러 관원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에 녹봉이 후하지 않고 백성은 그 폐단을 입게 되는 것이니, 왕개보(王介甫)의 이재론(理財論)은 실로 이것을 연유해서 지어지게 된 것이다.
그가 처음 강동(江東) 제형(提刑)으로 있을 때 회주(回奏)하기를, “지금의 소관(小官)은 녹봉이 너무 박하여 염치를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후하게 주는 방안을 강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재정이 궁핍한데 다시 이런 논설을 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시행하지 못할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재정은 일찍이 부족함이 없거늘, 다만 생재(生財)의 방법을 알지 못하고 또 재정을 잘 경리하는 사람이 없는 때문입니다.” 하니, 송 신종(宋神宗)이 그 말을 매우 좋게 여겼다. 그가 정사에 참여한 지 2일 만에 문득 재정을 경리하도록 조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곳곳마다 회역고(回易庫)를 설치하고 천하의 재정을 운영하다가 마침내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본뜻은 좋았으나 변통을 잘못하였던 것이다. 천부(泉府)의 설(說)은 왕개보가 창설한 것이 아니다. 이미 평준서(平準書 《사기》8서의 하나)에 나타나 있으며, 한 무제(漢武帝) 때에 상홍양(桑弘羊)이 아뢰어서 시행한 것이니 복식(卜式)의 이른바, “시장(市場)에 열지어 앉아 물건을 팔아 이익을 구한다.”는 것이 이것인데, 왕개보가 미처 보지 못한 듯하다. 왕개보가 《주역》을 익숙하게 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윗사람의 것을 덜어서 아랫사람에게 보태는 것이다.”라고 성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이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비록 위에 손실이 없이 아래에 이익이 되도록 하려 하나 어찌 그런 도리가 있겠는가?
송(宋) 나라가 태평한 지 또한 오래라, 임금의 용도가 한량이 없어 마치 수은을 방 가운데 흩뜨려 놓으면 한 움큼도 또한 잃고 두 움큼도 또한 잃어버려 틈에 스며들어 찾을 길이 없는 것과 같으나 모으는 술법만 있다면 그 물건이야 어디로 가겠는가? 만약 한결같이 옛제도를 따라 마땅한 조처를 얻는다면 아래에 이익되게 하는 방도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힘쓰지 않고 재물 모으는 데만 눈이 어두워 구차히 도모하는 것이 손하(損下)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그 패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또 녹봉이 후하지 않은 것은 관원이 많은 때문인데, 이 폐단은 《주례(周禮)》에서 시작되었다. 그 허다한 용관(冗官)을 반드시 주공(周公) 때에 제정하지는 않았을 것이요, 아마도 번문욕례(煩文縟禮)를 숭상한 후에 수시로 늘렸을 것이다. 이로부터 역대로 일은 적고 녹봉을 먹는 관원은 많으니, 만약 관원을 줄이고 일을 합친다면 녹봉은 스스로 후하게 될 것이다. 비유컨대 마부를 시켜 말을 기르는데 그 말먹이를 혹 덜어낼까 의심하고 다시 감관(監官)을 두면 말은 더욱 파리해 질 것이니, 이는 관원이 많은 폐단이라 하겠다.
한(漢) 나라 때 석건(石建)이 5일마다 한 번씩 근친(覲親)했으니, 관직에 있으면서 사가의 일을 보살핀 때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조(前朝 고려를 가리킴)의 형법지(刑法志)에, “관을 비우고 직책을 폐지하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니, 부모의 분상(奔喪) 이외에는 휴가를 허락치 않고 부득이한 볼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사직한 연후에 행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비답이 내린 후에 경관(京官)은 3일로 한정하고 외관(外官)은 10일로 한정하여 사은(謝恩)하고 곧 떠나갔다. 그리고 경조(慶弔) 이외에는 여러 아문(衙門)의 관원들이 권문(權門)에 나아가 알현하는 것을 법조(法曹)에 명하여 일체 금지했으니, 그 법이 또한 엄중하다 하겠다.
부세는 백성에게서 나오는데, 백성들은 일년 내내 한참도 쉴 겨를이 없이 밤낮으로 노력해서 그 수확한 곡식을 나라에 바치거늘, 그 곡식을 먹는 자들은 안일하게 지내고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과연 옳겠는가? 노력(努力)과 노심(勞心)이 서로 균등하다면 허다한 관원을 두지 않아도 일이 다스려질 것이다.
내가 매양 볼 때 관가의 일이 분답하는 것은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니요, 거의가 관원들끼리 서로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일을 만들면 일이 생기고 일을 덜면 일이 없다.”는 말이 있으니, 절실한 의론인 것이다. 왕개보는 비록 궁중(宮中)과 관부(官府)에 대해서는 절감시키지 못했으나, 어찌 외조(外朝)의 용관(冗官)마저도 도태시키지 못하고 말단의 지엽(枝葉)을 더듬어 잔약한 농민의 이익을 짜내려 하였던가?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후세의 징계가 되었고, 드디어는 옛일을 답습하여 직무를 폐기한 효시가 되었다. 그 여독은 희령(熙寧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1068~1077)의 정국을 그르쳐 놓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으니, 아! 슬프다.

[주D-001]왕개보(王介甫) : 이름은 안석(安石),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 송 신종(宋神宗) 때 승상. 그는 청묘법(靑苗法)을 만들어 정사를 개혁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주D-002]제형(提刑) : 송(宋) 나라 때 관명. 옥송(獄訟)을 살펴 그 곡직(曲直)을 바르게 하였다. 제점형옥관(提點刑獄官).
[주D-003]그가 정사에 …… 조처하였던 것이다 : 이 말은 왕안석이 강동 제형으로 외지에 있다가 탁지판관(度支判官)에 제수되어 내직으로 들어온 것을 말한다.
[주D-004]천부(泉府) : 《주례(周禮)》 지관(地官)에 속한 벼슬인데, 시장에서 팔리지 않아 적체된 물건을 걷어들이는 책임을 맡았다.
[주D-005]상홍양(桑弘羊) : 한 무제 때 대농승(大農丞)을 지냈다. 그는 천하의 염철(鹽鐵)을 총관리하고 경사(京師)에 평준서(平準署)를 두어 천하의 재정을 운영하였다.
[주D-006]윗사람의 것을 덜어서 아랫사람에게 보태는 것이다 : 이 말은 《주역》 익괘(益卦)의 단사(彖辭))에 “익괘는 윗사람의 것을 덜어서 아랫사람에게 보태는 것이니, 백성들의 기쁨이 한량이 없다[益 損上益下 民說旡疆].”라고 보인다.
[주D-007]석건(石建) : 한 무제 때의 효자. 벼슬이 낭중령(郞中令)에 이르렀다.
[주D-008]외조(外朝) : 《예소(禮疏)》에, “고문(庫門) 밖에 있는 관아를 외조라고 한다.” 하였으니, 품질이 낮은 관아를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지상 (역) ┃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