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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4권 Image of Original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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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江原道)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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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바닷가까지 10리, 서쪽은 평창(平昌)군 경계까지 1백 59리, 횡성(橫城)현 경계까지 1백 90리, 서남쪽으로 정선(旌善)군 경계까지 90리, 남쪽으로 삼척부(三陟府) 경계까지 94리, 북쪽으로 양양부(襄陽府) 경계까지 60리인데, 서울과 거리는 6백 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예국(濊國)인데, 철국(鐵國) 또는 예국(蕊國)이라고도 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이 지역을 임둔(臨屯)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하서량(河西良)이라 하였다 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하였다. 신라 선덕왕(善德王)은 작은 서울을 설치하여, 사신(仕臣)을 두었다. 무열왕(武烈王) 5년에 이 지역이 말갈(靺鞨)과 연접하였다 하여 작은 서울이라는 명칭을 고쳐 주(州)로 만들고, 도독(都督)을 두어서 진무하고 지키도록 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명주(溟洲)라 고쳤다. 고려 태조 19년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고, 성종 2년에 하서부(河西府)라 불렀다. 5년에는 명주도독부라 고쳤으며, 11년에 목(牧)으로 고쳤다. 14년에 단련사(團練使)라 하였다가, 그 후에 또 방어사(防禦使)라 개칭하였다. 원종(元宗) 원년에는 공신(功臣)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하였고, 충렬왕 34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부로 만들었다. 공양왕 원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연곡현(連谷縣) 부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 지산현(支山縣)이며 양곡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 때에 명주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顯宗)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그대로 예속시켰다. 우계현(羽溪縣) 부 남쪽 6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 우곡현(羽谷縣)이며 옥당(玉堂)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삼척군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고려 현종 9년에 본부로 이속시켰다.
【진관】 도호부 2 삼척ㆍ양양. 군 4 평해(平海)ㆍ간성(杆城)ㆍ고성(高城)ㆍ통천(通川). 현 2 울진(蔚珍)ㆍ흡곡(歙谷).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예국(濊國)ㆍ임둔(臨屯)ㆍ하슬라(何瑟羅)ㆍ하서량(河西良)ㆍ명주(溟州)ㆍ동원(東原)ㆍ임영(臨瀛)ㆍ동온(東溫)ㆍ경흥(慶興)ㆍ명원(溟源)ㆍ예국(蘂國) 이하는 이곡(李穀)의 〈염양사(艶陽寺)〉 기문(記文)에 있다. 철국(鐵國)ㆍ도원경(桃源京)ㆍ북빈경(北濱京).
【성씨】 본부 김ㆍ최ㆍ함(咸)ㆍ박ㆍ곽, 왕 임금이 하사(下賜)한 성인데, 그 후에 옥(玉)으로 고쳤다.평창(平昌). 원(元) 원주(原州). 연곡(連谷)ㆍ명(明)ㆍ이ㆍ진(陳)ㆍ신(申)ㆍ장(蔣). 우계(羽溪) 이ㆍ변(邊)ㆍ노(盧)ㆍ심(沈), 유(劉) 속성(續姓)이다.
【풍속】 욕심이 적다 《후한서(後漢書)》에, “그 지역 사람은 성품이 어리석고 성실하며 욕심이 적어서, 청하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지 않는다 《후한서》에 있다. 질병을 싫어한다 《후한서》에, “질병을 아주 싫어하여, 사람이 죽으며 살던 집을 홀연히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짓는다.” 하였다. 삼[麻]을 심고 누에를 치며 면포를 만든다 《후한서》에 있다. 별을 살핀다 《후한서》에 있다. “별을 살펴서 그해의 풍ㆍ흉을 미리 안다.” 하였다. 벌할 때에는 우마를 받는다 《후한서》에, “촌락에 서로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서로 벌하며 우마(牛馬)를 받는데 책화(責禍)라 부르며, 살인한 자는 죽음으로써 보상하게 한다. 도둑이 적고 보병으로 하는 싸움을 잘한다.” 하였다. 학문을 숭상한다 다박 머리 때부터 책을 끼고 스승을 따른다. 글 읽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히 들리며, 게으름 부리는 자는 여럿이 함께 나무라고 꾸짖는다. 놀이를 좋아한다 그 지역 풍속에 명절을 만나면 서로 맞이하여 함께 마시며, 보내고 맞이하는 일이 끊임없다. 그러나 농사에 힘쓰지 않아서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다.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서 구름 속에 개간한다 이제현(李齊賢)이 박안집(朴安集)에게 준 시에,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서 푸른 구름 속에 개간한다.” 하였다. 예의(禮義)를 서로 먼저한다 황희(黃喜)의 시에, “예의로 오래된 지역인데, 어찌 괴이쩍게 신선을 말하리.” 하였다. 청춘경로회(靑春敬老會) 고을 풍속이 늙은이를 공경하여, 매양 좋은 절후를 만나면 나이 70 이상 된 자를 청하여 경치 좋은 곳에 모셔놓고 위로한다. 판부사 조치(趙菑)가 의롭게 여겨서 관가의 재용에서 남은 쌀과 포목(布木)을 내어 밑천을 만들고, 자제들 중에서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자를 가려서 그 재물의 출납을 맡아 회비(會費)로 하도록 하고, ‘경춘경로회’라 명명하였다.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며, 비록 노부의 천한 사람이라도 나이 70 된 자는 모두 모임에 오도록 하고 있다.
【형승】 산맥은 북쪽에서 왔고, 바다가 동쪽 끝이 된다 이곡(李穀)의 시에, “산맥이 북쪽에서 왔는데 푸름이 끝나지 않았고, 바다가 동쪽 끝이어서 아득하게 가이 없어라.” 하였다. 산수가 천하에 첫째이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강릉의 산수 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 하였다. 창해가 넓고 크며, 골짝이 천 겹이다 안축(安軸)의 기문에, “먼 데 있는 물을 창해가 넓고 크며, 먼 데 있는 산은 골짝이 천 겹이다.” 하였다. 일도(一道)에서 큰 부(府)이니, 부상(扶桑)을 당기고 양곡(陽谷)을 잡는다 서거정(徐居正)의 〈운금루(雲錦樓)〉 기문에 있다.
【산천】 오대산(五臺山) 부 서쪽 1백 40리에 있다. 동쪽이 만월(滿月), 남쪽이 기린(麒麟), 서쪽이 장령(長嶺), 북쪽이 상왕(象王), 복판이 지로(智爐)인데, 다섯 봉우리가 고리처럼 벌려 섰고,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라 이름하였다. 우리 세조대왕께서 12년에 관동(關東)에 행차하다가 이 동구에 보연(寶輦)을 머물고, 과거를 베풀어 진지(陳祉) 등 18명을 뽑았다.
○ 진화(陳澕)의 시에, “당년에는 그림 속 오대산을 보았는데, 구름 속에 높고 낮은 푸른 산이 있더니, 지금 만 골짝 물이 다투어 흐르는 곳에 와서 보니, 구름 속에서도 길은 어지럽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노라.” 하였다.

대관령(大關嶺) 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州)의 진산이다. 여진(女眞) 지역인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嶺)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99구비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의 치소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가 권적(權迪)의 시를 차운(次韻)한 시에, “대관산(大關山)이 푸른 바다 동쪽에 높은데, 만 골짜기 물이 흘러나와 물이 천 봉우리를 둘렀네. 험한 길 한 가닥이 높은 나무에 걸렸는데, 긴 뱀처럼 구불구불 모두 몇 겹인지. 가을 서리는 기러기 가기 전에 내리고, 새벽 해는 닭이 처음 우는 곳에 돋는도다. 높은 절벽에 붉은 노을은 낮부터 밤까지 잇닿고, 깊숙한 벼랑엔 검은 안개가 음천(陰天)에서 갠 날까지 잇닿았네. 손을 들면 북두칠성 자루를 부여잡을 듯, 발을 드리우면 은하수(銀河水)에 씻을 듯하다. 어떤 사람이 촉도난(蜀道難)을 지을 줄 아는고, 이태백(李太白)이 죽은 뒤에는 권부자(權夫子)로세.” 하였다.

보현산(普賢山) 부 서쪽 35리에 있다.
원읍현(員泣峴) 부 서쪽 41리에 있으며 대관령 중턱이다. 세간에 전해지기로는, “어떤 원이 강릉 부사로 있다가 갈려서 돌아가는데, 여기에 와서는 되돌아보며 슬프게 눈물을 흘렸으므로 인하여 원읍현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길이 구산역(丘山驛)으로 접어들자 양의 창자처럼 꾸불꾸불하여 말이 가지 않는다. 앞에 선 말 몰이꾼은 나무끝으로 가고, 잔도(棧道)는 구름 끝에 걸리었네. 북쪽을 바라보니 산이 창 같고, 동쪽을 임하니 바다가 하늘에 닿았네. 부여잡고 가는 길 다한 곳에 우주가 다시금 아득하여라.” 하였다.

모로현(毛老峴) 부 서쪽 1백 25리에 있다. 독현(禿峴) 부 서쪽 1백 89리에 있다. 화비현(火飛峴) 부 남쪽 35리에 있다. 영의 흙이 검어서, 불에 탄 것 같은 까닭에 화비(火飛)라 이름한 것이다. 삽현(鈒峴) 부 서남쪽 60리에 있으며, 정선(旌善)으로 가는 길이다. 월정산(月正山) 부 동쪽 6리에 있다. 화부산(花浮山) 부 북쪽 3리에 있다. 소은백이산(所隱柏伊山) 부 서쪽 65리에 있다. 전해오는 얘기에, “신선이 사는 곳이다. 옛적에 사냥꾼이 짐승을 쫓다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 골 안을 바라보니, 늙은 나무와 띳집과 길들이 죽 늘어섰고, 시냇가에는 베를 마전하고 옷을 빨아 널어서, 의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산에서 내려가, 찾아보았으나 구름과 아지랑이가 골짜기에 가득하고 어지러워 그곳을 몰랐다.” 한다.
소우음산(所亏音山) 부 서쪽 80리에 있다. 산속에 샘이 있고 날씨가 가물어서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해령산(海靈山) 부 동쪽 27리에 있다. 담정산(淡定山) 부 남쪽 32리에 있다. 사화산(沙火山) 부 북쪽 30리에 있다. 주문산(注文山) 연곡현(連谷縣) 북쪽 12리에 있으며, 부와는 42리 거리다. 바다 부 동쪽 10리에 있다. 견조도(堅造島) 부 동쪽 10리에 있으며, 남천(南川) 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어구이다. 성남천(城南川) 부성(府城) 남쪽 1백 보에 있으며, 물 근원이 대관령에서 나온다. 여러 골짜기 물과 합류하여 송악연(松嶽淵)ㆍ광제연(廣濟淵)이 되고,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금강연(金剛淵)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곁에 있으며, 부에서 서쪽으로 1백 10리이다. 4면이 모두 반석이고 폭포는 높이가 열 자이다. 물이 휘돌아 모여서 못이 되었는데, 용이 숨어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봄이면 여항어(餘項魚)가 천 마리, 백 마리씩 무리지어서 물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이 못에 와서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맥질한다. 힘을 내어 낭떠러지에 뛰어오르는데, 혹 오르는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반쯤 오르다가 도로 떨어지기도 한다.
○ 정추(鄭樞)의 시에, “금강연 물이 푸르게 일렁거려, 갓 위에 묵은 먼지를 씻어낸다. 월정사에 가 옛 탑을 보려 하는데, 석양에 꽃과 대[竹]가 사람을 매우 근심스럽게 한다.” 하였다.

우통수(于筒水) 부 서쪽 1백 50리에 있다. 오대산 서대(西臺)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곧 한수(漢水 한강)의 근원이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서대의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니, 물 빛깔과 맛이 딴 물보다 훌륭하고 물을 삼감도 또한 그러하니 우통수라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한강이 되어 바다에 들어간다. 한강은 비록 여러 곳에서 흐르는 물이 모인 것이나, 우통 물이 복판 줄기가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는 것이 중국에 양자강(楊子江)이 있는 것과 같으니 한강이라는 명칭도 이 때문이다.” 하였다.

방림천(芳林川) 부 서쪽 1백 58리에 있다. 연곡포(連谷浦) 연곡현 동쪽 5리에 있으며, 북에서는 35리다. 오진(梧津) 우계현 남쪽 30리에 있다. 주문진(注文津) 연곡현 북쪽 10리에 있으며 부에서 40리다. ○ 이상 세 곳 포구에는 모두 척후가 있다. 안인포(安仁浦) 부 동남쪽 25리에 있다. 예전에는 만호영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토산】 모시[苧]ㆍ궁간상(弓幹桑) 우계현에서 산출한다. 죽전(竹箭) 부 북쪽 증산(甑山) 및, 부 동북쪽 강문도(江門島)에서 산출한다. 잣[海松子]ㆍ오미자(五味子)ㆍ자단향(紫檀香)ㆍ회양목[黃楊]ㆍ지치[紫草]ㆍ송이[松蕈]ㆍ인삼(人蔘)ㆍ지황(地黃)ㆍ복령(茯苓)ㆍ꿀[蜂蜜]ㆍ산무애뱀[白花蛇]ㆍ해달(海獺)ㆍ소금[鹽]ㆍ미역[藿]ㆍ참가사리[細毛]ㆍ김[海衣]ㆍ해삼(海蔘)ㆍ전복[鰒]ㆍ홍합(紅蛤)ㆍ문어(文魚)ㆍ삼치[麻魚]ㆍ방어(魴魚)ㆍ넙치[廣魚]ㆍ적어(赤魚)ㆍ고등어[古刀魚]ㆍ대구[大口魚]ㆍ황어(黃魚)ㆍ연어(鰱魚)ㆍ송어(松魚)ㆍ은어[銀口魚]ㆍ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ㆍ순채[蓴]ㆍ회세합(回細蛤).
【성곽】 읍성 흙으로 쌓은 것은 둘레가 2천 1백 8자이고, 높이는 40자이다. 돌로 쌓은 것은 둘레가 1백 39자이고, 높이는 두 자이다. 성안에는 우물 14곳, 못 둘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임신년에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1천 7백 82자이고 높이는 9자이다.

【봉수】 주문산 봉수(注文山烽燧) 북쪽으로 양양부(襄陽府) 양야산(陽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사화산(沙火山)에 응한다. 사화산 봉수 남쪽으로 소동산(所同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주문산에 응한다. 소동산 봉수 부 동쪽 7리에 있다. 남쪽으로 해령산(海靈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사화산에 응한다. 해령산 봉수 남쪽으로 오근산(吾斤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소동산에 응한다. 오근산 봉수 우계현 북쪽 20리에 있다. 남쪽으로 어달산(於達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해령산에 응한다. 어달산 봉수 우계현 남쪽 30리에 있다. 남쪽으로 삼척부 광진산(三陟府廣津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오근산에 응한다.
『신증』 【궁실】 동헌(東軒) 성현(成俔)의 시에, “바다와 산 아름다운 경치 새해가 되어서, 봄빛이 봉호(蓬壺) 동리(洞裏)의 하늘에 가득하네. 오도(鰲島)에는 나는 새 위에 아지랑이 날고, 주루(珠樓)에는 저녁 볕 가에 노래와 피리로다. 한 줄기 시냇물은 천 집을 감싸 담을 이루고, 나무에 가득한 꽃은 십 리 연기를 머금었네. 경포(鏡浦)에 개인 물결이 파랗게 일렁이는데, 목란(木蘭)배에 술을 실어 신선을 끼고 노네”
○ “홍진(紅塵)에 분주하기 몇 해였던가, 부절을 잡고 와서 속세 밖에 노니노라. 흰 고개마루는 우뚝하게 북극과 잇닿았고, 은빛 물결은 넓고 넓어 동쪽 끝이 아득하네. 푸른 소나무는 눈을 머금고 햇볕에 빛나고, 푸른 대숲에 바람이 잔잔한데 저물녘 연기가 감돈다. 추위가 두려워 술 한잔 기울이니, 이 몸이 도리어 주중선(酒中仙)이 되었나.” 하였다.
○ 홍귀달(洪貴達)의 시에, “대관령 밖에 봄이 돌아와 또 한 해가 오니. 화창한 햇볕이 하늘에 걸렸네. 성에 가득한 복숭아ㆍ오얏은 봄바람에 피고, 들에 가득한 뽕나무와 삼은 곡우(穀雨) 무렵에 자란다. 푸른 풀 못에는 오리가 처음 놀고, 채색구름 누각에는 다시 연기가 섞였네. 성남(城南)에는 놀이꾼이 나날이 많아지는데, 검은 머리 불그레한 낯이 낱낱이 신선인 듯하여라.” 하였다.
○ 이우(李堣)의 시에, “동쪽으로 와서 나이 더했음을 탄식하지 마라. 아름다운 절후는 한식날이 가까웠네. 일천 집 누각 위에는 노래와 피리소리요. 꾀꼬리와 꽃은 10리까지 취하고 깨는 동안이라. 황정(黃精) 이삭이 새로 비에 젖었는데, 벽해에 곡괭이 가지고 연기를 파헤침 직하다. 일찍이 신선의 약방문을 공부 못한 것 후회로워라, 반생 동안 연화(煙火) 속에서 신선되기를 바랐노라.” 하였다.
○ 정수강(丁壽崗)의 시에, “임영(臨瀛) 옛 마을이 몇 천 년이던가, 지역이 동남으로 열리어 바다를 당기었네. 산천은 예전 그대로 눈앞에 들고, 누각은 중수되어 구름 곁에 솟았네. 집집마다 선비는 삼동(三冬)에 공부를 하고, 곳곳마다 풍년이 드니 만 집에 연기로세. 이것은 임금의 교화를 펴는 사또의 힘이라, 나는 이제 도리어 주중선(酒中仙)이 되었노라.” 하였다.
○ 민수천(閔壽千)의 시에, “기쁜 일 많은 임영에는 세월이 절로 가니, 화려한 경치는 봄철에 가장 좋다네. 향긋한 묵은 술맛은 금항아리 안에 있고, 채색오리 봄 소리는 옥경(玉鏡)가에 있노라. 한 길의 꽃은 붉기가 비단보다 더하고, 천 집 버들은 푸르러 연기와 같구나. 도원(桃源)은 다만 진(秦) 나라를 피한 무리일 뿐이요, 동쪽 바람에 경포대의 신선놀이보다 못하다.” 하였다.

【누정】 운금루(雲錦樓)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강릉부는 본래 예국(濊國)의 터이다. 한(漢) 나라에서 4군을 설치하면서 임둔(臨屯)이라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하서량(河西良)이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명주(溟州)라 일컬었다. 고려 초기에는 동경(東京)을 설치하였다가 그 후에는 하서 또는 경흥이라 불렀고, 충렬왕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던 바, 강원 일도에서 큰 부(府)다. 지역이 바닷가라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가 많으며, 가끔 신선들이 남긴 자취가 있다. 임영이라 부르는 것은 대개 봉영(蓬瀛)과 겨누는 것이리라. 습속이 맑고 간이(簡易)하며, 인심이 순박하여 예스러운 기풍이 있다. 성화(成化) 정유년에 부상(府相) 이공(李公)이 이 고을에 와서 다스리게 되었는데, 두어 달도 못 되어 정사가 크게 다스려졌다. 예전에 객관 남쪽에 운금루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수리하지 않은 지가 십오륙 년이나 되었다. 공이 개연히 중건할 뜻이 있어서 조금 동북쪽으로 옮겨 고쳐 지었는데, 여러 집 위에 우뚝하게 솟아났다. 누 남쪽에는 못이 있어 연(蓮)을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이 있고 섬 위에는 대[竹]를 심었다. 그 훌륭한 경개는 기이하고 특별하다고 할 만하였다. 하루는 후의 아들 부정(副正) 덕숭(德崇)이 후의 명을 전하고, 나에게 기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이고, 관동에서도 강릉이 제일이다. 그런데 일찍이 가정(稼亭) 이(李) 선생의 〈동유기(東遊記)〉와 근재(謹齋) 안상국(安相國)의 〈관동와주(關東瓦注)〉를 읽어보니, 강릉에서 가장 좋은 명승지는 경포대ㆍ한송정(寒松亭)ㆍ석조(石竈)ㆍ석지(石池)ㆍ문수대(文殊臺)라는 것을 알았으며, 따라서 선배의 풍류 또한 상고할 수 있었다. 한송정 거문고 곡조는 중국까지 전해졌고, 박혜숙(朴惠肅)ㆍ조석간(趙石磵)의 경포대 놀이는 지금까지 좋은 이야깃거리로 되었으며, 호종단(胡宗旦)이 물에 비석(碑石)을 빠뜨린 것도 또한 기이하다. 나는 직무에 얽매여서 한 차례 탐방할 여가를 얻지 못하고서, 동쪽으로 임영을 멀리 바라보고 와유강산(臥遊江山)하는 흥취만 허비한 지가 오래였다. 이번에 기문지으라는 명을 받고 기꺼이 말한다.
내 들이니, 누의 높이가 공중에 높이 솟아 풍우도 아랑곳 없고, 누의 크기는 수백 사람이 앉을 만하다 한다. 누에 올라 바라보면 부상(扶桑)을 휘어잡고, 양곡(暘谷)을 당길 듯하다. 풍악(楓岳)이 등에 있고, 오대산이 겨드랑에 있다. 바다 위 여러 봉우리는 푸르르게 뾰족뾰족 옹기종기 노을 아득한 사이에 들락날락하는 것이 털이나 실같이 보인다. 아침 볕과 저녁노을이 사시(四時)로 바뀌는 것과, 온갖 경물이 변하는 천 가지 만 가지 형상은 한두 가지로써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오직 운금(雲錦)이란 이름으로써 현판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일찍이 소자첨(蘇子瞻)의 〈하화시(荷花詩 연꽃)〉를 보니, 하늘 베틀에 구름 같은 비단이라는 말이 있으니, 내 상상하건대 아마 여기에서 취한 것이리라. 그 못에 파란 물이 넘실거리고 연꽃이 한창 피어서, 붉은 향기와 푸른 그림자가 서로 비치고 둘리어, 바람ㆍ비ㆍ달ㆍ이슬에 깨끗하게 서 있는 것과, 맑아서 멀리서만 바라볼 수 있는 기이한 모습과 특이한 태도가 기상이 한결같지 아니하다. 그 덕을 논한다면 줄기 속은 통하고 밖은 곧아서, 군자의 기상인데 주자(周子)의 〈애련설(愛蓮說)〉에다 설파하였다. 그러하니 이 누에 놀고 휴식하며 오르내리는 자는 특히 술잔으로써 이렁저렁 세월을 허비하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티끌에서 벗어난 깨끗한 벗이어서 또한 물(物)을 보고서 자신을 돌아보게 할 만한 것이라. 이미 물을 보고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면, 어찌 깨끗한 벗으로만 그칠 뿐이겠는가.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 그러하니 위에 말한, 경포대ㆍ한송정ㆍ사선정(四仙亭)ㆍ풍악산ㆍ오대산 등 모든 눈에 와닿고 마음에 느껴지는 어느 것이, 인자ㆍ지자의 쓰는 바이며, 나의 심성을 수양하는 데에 모두 도움이 되는 것이다. 후가 이 누를 중건하는 것이 어찌 뜻이 없었으리요. 그러나 내가 보지도 않고 억지로 말하는 것은 또한 거짓에 가깝지 않을까. 후일에 만약 몸이 한가하게 되어서 관동지방에 유람하고 싶은 나의 소원을 이루게 된다면, 마땅히 황학(黃鶴)을 부르고 백운(白雲)을 부여잡아서 이 누에 올라 글을 읊어서 나의 할 말을 마치리라. 이후의 이름은 신효(愼孝)이고, 자는 자경(自敬)이며, 전성(全城)에 명망 있는 씨족이다. 여러 번 주(州)와 군(郡)을 맡아서 명관으로써 이름이 났다.” 하였다.
○ 조운흘(趙云仡)의 시에, “운금루 앞 운금대에서 취해서보니, 구름같은 비단이 못에 가득 피었네. 세상에 어찌 천 년토록 사는 방법이 있으랴, 날마다 피리와 노래에 휩싸여 술잔을 기울이게나.” 하였다.
○ 성석인(成石因)의 시에, “붉은 다락이 높게 솟아 지대(池臺)를 눌렀는데, 만 송이 연꽃이 차례로 피네. 날 저물녘에 솔솔 바람이 한번 스치니, 맑은 향기가 은은하게 금잔에 든다.” 하였다.
『신증』 박시형(朴始亨)의 기문에, “임영은 예국(濊國)의 터이다. 예전 명도(溟都)이며, 삼한(三韓) 때에는 북빈경(北濱京)이었다. 고려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는데, 이는 신라 태종(太宗)의 5대손 주원공(周元公)이 도읍하여서 여러 대로 살았던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그 후에는 혹 명주목이라 혹은 도독부라 불렀으며, 지금은 도호(都護)에다 대(大)자를 붙여서 구별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름난 구역의 훌륭한 경치가 사방에 알려져서, 고관으로 풍류를 좋아하는 사대부 누구나 그 지역에 한번 가서 평소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으로 말미암고, 물화(物華)는 하늘이 내린 보배인 것으로서 그 절묘하고 장함이 대관령 동쪽에서는 집대성(集大成)하여, 유독 으뜸이 되게 한 것이로다. 그 호수와 산의 훌륭함이 유람하기에 좋은 것은 이곳의 어디를 가든 그러하나, 그중에서도 한두 가지를 든다면, 관도(官道)에 있는 누각은 의운(倚雲)이라 현판하였고, 연당(蓮塘)에 있는 누각은 이름이 운금(雲錦)이다. 동쪽으로 바닷가에 있는 정자는 한송(寒松)이며, 북쪽으로 호수에 가까운 누대는 경포(鏡浦)다. 이것이 모두 명승의 으뜸이다. 손님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술 마시며 시가를 읊고, 강산에 취미를 붙이고 우주에 눈을 들어 회포를 헤치고 기상을 펴는 곳이다. 운금의 높은 누(樓)는 예전에는 객관 동쪽에 있었는데, 계미년에 관사를 개축하면서 옛 제도가 좁고 작다 하여 동쪽으로 터를 넓혀, 추녀를 크게 하므로써 누는 드디어 없어졌다. 그 후로 중건하지 않은 지가 15년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운금이라는 이름만 있고 누는 없어졌다. 매양 누렇게 매실이 익을 무렵의 무더위나, 연꽃이 향기로울 때나, 봄바람 가을달에 대숲 그림자가 너훌거리는 때에 누대와 정자에 유람하여 회포를 펼 만한 곳이 없었다. 심지어는 선배들의 제영(題詠)조차 높은 다락에 묶어 두어서 부르고 화답하는 자가 없으니, 시인 재자(詩人才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성화(成化) 을미년 겨울에 전성 이후 신효(全城李侯愼孝)가 이 고을 원으로 왔고, 통판 월성 최군 연(通判月城崔君演)이 보좌하게 되었다. 일으킬 것과 없앨 것이 있으면 모두 시행하니, 다스림의 덕화가 흡족하여 뭇사람이 칭송하였다. 부임한 지 한 해가 되자 온갖 퇴폐하였던 것이 아울러 일어났다. 시들고 병들었던 민생이 모두 밭 갈고 우물 파서 촌락이 편안하니, 관리는 할 일이 없었다. 후가 드디어 옛 누를 중건할 뜻이 있어서 방백(邦伯 감사) 김상 양경(金相良敬)에게 사유를 갖추어 말하여 허가를 맡았고, 안상 관후(安相寬厚)가 김상(金相)의 후임으로 와서 비용을 도와 주었다. 이에 객관 북쪽에 터를 잡아 가시덤불을 불태우고, 높낮음을 측량하며 물러서서 보니, 기이한 형상이 완연히 하늘이 낸 것이었다. 이에 놀고 있는 자들을 모집하고 아전들을 부리며 관에서 공급하였다. 이해 7월에 일을 시작하였는데, 겨우 일곱 달이 되자 아로새긴 기와와 채색한 서까래가 갑자기 우뚝솟았다. 깊이는 여섯 발쯤이고, 옆은 네 발이 조금 넘는데, 아마 하늘이 그 지역을 숨겨 두었다가 그 사람에게 주었던 것 같다.
아, 물(物)의 흥함과 폐함은 때가 있는 것이니, 이 누가 헐리고 객관이 되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관사의 굉장 화려함이 예전 규모보다 훨씬 나음을 알았을 뿐이요, 풍류의 아름다운 흥치는 이 누가 없어지므로써 좌절된 것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그 후 15년이라는 오랜 시일을 지나, 이후(李侯)가 옴으로써 비로소 복구되었는데 지세의 웅장함과 규모의 거룩함이 전일의 누각보다 몇 배가 되니, 이것이야 말로 어찌 흥하고 폐함이 때가 있으며, 또 그 사람을 기다려서 흥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후는 대대로 벼슬한 집의 자손으로서 일찍부터 시와 예로써 가르침을 받았고, 맑은 덕과 행정의 솜씨로 장한 명망이 있음이 오래였다. 그리고 본래부터 기이한 경치를 좋아하여 마음은 속세 밖에 놀아서 시원하게 공중의 바람을 타고 노니는 신선의 기상을 숨길 수 없었으니, 바로 옛 사람의 이른바 좋아하는 것이, 산수 사이에 있어서 마음속에 자득한 것이니, 그의 풍류와 고상한 뜻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나는 이 고을 사람이니, 즐거운 마음을 뽐내어서 송사를 꾸며, 거리에서 노래하기를 원한다. 송(頌)에 이르기를, ‘악양(岳陽)에 누(樓) 있으니 동정호(洞庭湖)가 눈앞에 있고, 등왕(滕王)이 각(閣)을 지으니 형려(荊廬)가 안개처럼 벌여 섰다. 높은 데에서 낮은 곳에 임하였고 공중에 솟아 바람을 탄 듯한데, 누각이 아니면, 이런 경치 있을 것인가. 대관령 밖 형승은 임영부(臨瀛府)가 독차지하였다. 운금(雲錦)의 높은 누각이 뛰어나게 깨끗하여 사랑스러웠는데, 그것을 없애고 객관을 지으면서 터마저 뭉개버렸다. 그리하여 여러 해가 그럭저럭 지나갔다. 호수와 산이 조롱하고 꽃과 대도 부끄러워하였다. 우리 이후는 하늘이 낳은 영재였다. 깨끗한 충성과 아름다운 절조(節操)를 지닌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었다. 그의 풍류와 문장은 옛 사람과 겨루어도 양보할 데가 없다. 금당(琴堂)에 일이 한가하니, 호기로운 마음이 났다. 이에 기이한 터를 잡으니, 없어졌던 누각이 다시 통창하였다. 웅장하고 아름다움이 예전 규모보다 곱절이었다. 귀신이 가만히 와서 도와주는 듯하다. 아전들은 자식이 아비 일 돕듯 몰려왔고 한 푼 돈도 거두지 않았다. 겨우 일곱 달이 지나자 벌써 일손을 떼었다. 좌우로 보니 산천의 기상이 천 가지 만 가지였다. 하늘이 만든 것을 땅이 숨겨서 기다림이 있었던 것이다. 공사를 마치니 절후는 중양(重陽)이었다. 이에 고을 늙은이들을 불러서 술잔을 권했다. 이어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활과 살이 베풀어졌다. 술잔과 상이 낭자하고, 퉁소와 북소리가 뚱땅거렸다. 이에 낙성하니 즐거움이 다함 없다. 빈객이 취하고 배부른 것은 오직 덕으로써 함이었다. 모두 말하되 우리 후를 생각하여 잊지 못하겠다. 우리 후가 정사하여 우리를 구휼하고 우리를 애무하였다. 무릇 혈기가 있는 자가 오직 이후를 믿고 산다. 누가 소신신(召信臣 한 나라 공경(公卿)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소부(召父)의 칭을 받음) 아비라 하던가, 우리 후가 아비이고, 누가 두시(杜詩)를 어미라 하던가, 우리 후가 어미이다. 우리 후가 지은 누는 감당(甘棠)나무 짝하리. 질병 없이 천수를 누리기를 바라노니, 수하시어 우리 향토를 보호하소서. 우리의 말은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 바지가 다섯이라[五袴 선정을 베풀어 살기 좋다는 뜻]는 노래로다.’ 하였다.” 하였다.
○ 성현(成俔)의 시에, “능파선자(凌波仙子)가 요대(瑤臺)에 기댔는데, 취한 듯 붉으레한 얼굴에 보조개 방싯, 비록 이것이 정이 없고 말도 못하나, 경성(傾城)할 풍골(風骨)이 술잔을 권하네.”
○ “우거진 나무들이 양대(涼臺)를 감쌌는데, 땅에 가득한 짙은 그늘 빽빽하여라. 관청의 문서가 나날이 적어지고 동헌 뜰이 고요한데, 때때로 상비(象鼻)를 당겨 경배(瓊杯)를 만든다.” 하였다.

의운루(倚雲樓) 객관 남쪽에 있다. 여절당(勵節堂) 객관 서북쪽에 있다. 부중(府中) 사람이 여기에서 조운흘(趙云仡)을 위하여 제사하니, 속칭 생사당(生祠堂)이라 한다. 한송정(寒松亭) 부 동쪽 15리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ㆍ돌아궁이[石竈]ㆍ돌절구[石臼]가 있는데, 곧 술랑선인(述郞仙人)들이 놀던 곳이다.
○ 《악부(樂府)》에 〈한송정곡(寒松亭曲)〉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이 곡조를 비파(琵琶) 바닥에 써 둔 것이 물결을 타고 강남 지방으로 떠밀려 갔으나, 강남 사람은 그 글의 뜻을 몰랐다. 고려 광종(光宗) 때에 우리나라 사람 장진산(張晉山)이 강남에 사신으로 갔더니 강남 사람이 그 글 뜻을 묻는 것이었다. 진산은 시를 지어서 풀이하기를, “달 밝은 한송정 밤이요, 물결 고요한 경포의 가을이라, 슬피 울며 오고가니, 모래 위에 갈매기는 신의가 있도다.” 하였다 한다.
○ 안축(安軸)의 시에, “네 선인이 일찍이 여기에 모였을 때, 객은 맹상군(孟嘗君)의 문전 같았더니라. 구슬 신발은 지금엔 구름처럼 자취도 없고, 푸른 소나무는 불타고 남지 않았네. 신선을 찾아 빽빽하던 푸른 숲 생각하고 옛일을 추억하며 황혼에 섰노라. 오직 차 다리던 샘물만이 남아, 예전 그대로 돌밑에 있다.” 하였다.
○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먼 옛날 신선놀이 까마득한데, 창창(蒼蒼)한 소나무 홀로 서 있다. 다만 샘 밑에 달이 남아 비슷하게 형용을 상상한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외로운 정자가 바다를 임해 봉래산 같으니, 지경이 깨끗하여 먼지 하나 용납않네. 길에 가득한 흰모래는 자욱마다 눈[雪]인데, 솔바람 소리는 구슬 패물을 흔드는 듯하다. 여기가 네 신선이 유람하던 곳, 지금에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여라. 주대(酒臺)는 기울어 풀속에 잠겼고, 다조(茶竈)는 내딩굴어 이끼 끼었다. 양쪽 언덕 해당화는 헛되이 누굴 위해 지며 누굴 위해 피는가. 내가 지금 경치를 찾아 그윽한 흥취대로 종일토록 술잔을 기울이네, 앉아서 심기가 고요하여 물(物)을 모두 잊었으니, 갈매기들이 사람 곁에 날아내리네.” 하였다.
○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옛 땅에 인가는 멀고, 차가운 조수만이 해문(海門)을 두드린다. 천 그루 소나무는 이미 넘어졌어도, 눈알 같은 두 우물이 아직도 남았다. 새 날아가니 모래톱 고요하고, 갈가마귀 빙빙 도는데 산에 해가 저문다. 돌아가려다가 다시 머물러, 잠깐 흰 구름 밑에 섰노라.”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오로지 좋은 경치만을 찾을 양으로, 옛 성문을 일찍 나섰다. 선인은 가도 송정(松亭)은 있고, 산에는 석조(石竈)가 묻혀 남아 있네. 인정은 예와 지금이 달라도, 경치는 아침이요 저녁이로다.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말만 듣고 근거없다 했을 것이다.” 하였다.
○ 고려 이무방(李茂芳)의 시에, “정자가 소나무 산기슭에 의지했는데, 동쪽으로 바라보니 바다는 끝없다. 지경이 고요하니 신선 자취있고, 모래 밝은데 새 발자국 남았네. 비석에는 이끼 무늬 푸르고, 돌에는 비 맞은 자국이 어둡네. 한 웅큼 되는 샘이 마르지 않으니, 천지의 뿌리에서 솟아나오네.” 하였다.
○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옛 선인이 유랑하던 곳에, 다투어 사모하여 객이 문간을 메우네. 약을 만들던 사람은 어디로 갔나, 차 달이던 아궁이만 홀로 남았네. 항아리 속에 일월(日月)이 한가한데, 세상일은 아침저녁 동안이어라. 머리를 돌려서 유적을 찾으니, 오직 소나무만이 절로 뿌리 박았네.” 하였다.

경포대(鏡浦臺) 부 동북쪽 15리에 있다. 포의 둘레가 20리이고, 물이 깨끗하여 거울같다. 깊지도 얕지도 않아, 겨우 사람의 어깨가 잠길 만하며, 사방과 복판이 꼭 같다. 서쪽 언덕에는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는 누대가 있으며, 누대가에 선약을 만들던 돌절구가 있다. 포 동쪽 입구에 판교(板橋)가 있는데 강문교(江門橋)라 한다. 다리 밖은 죽도(竹島)이며, 섬 북쪽에는 5리나 되는 백사장이 있다. 백사장 밖은 창해 만 리인데, 해돋이를 바로 바라볼 수 있어, 가장 기이한 경치다. 또한 경호(鏡湖)라 하기도 하며, 정자가 있다. 일찍이 우리 태조(太祖)와 세조(世祖)께서 순행하다가 여기에 어가를 멈추었다.
○ 안축의 기문에, “천하의 물건이 형체가 있는 것은 모두 이치가 있으니, 크게는 산과 물, 작게는 주먹만한 돌, 한 치만한 나무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유람하는 사람은 이런 물건을 보고 흥을 느끼며, 따라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누대와 정자를 짓게 되는 이유이다. 형체가 기이한 것은 외면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눈으로 구경하게 되는 바이며, 이치를 찾자면 미묘한 데에 숨겨져 있어 마음으로 얻는 바이다. 눈으로 기이한 형체를 구경하는 데에는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가 모두 같이 그 한쪽만을 보게 되며, 마음으로 미묘한 이치를 깨치는 것은 군자만이 그러하여 그 전체를 즐거워한다. 공자(孔子)께서,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 하셨다. 이것은 그 기이한 형체를 구경하면서 한쪽만 보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고, 대개 미묘한 이치를 깨쳐서 그 전체를 즐김을 말한 것이다.
내가 관동지방을 유람하기 전에 관동의 형승을 평논하는 자는, 무두 국도(國島)와 총석(叢石)을 말하고 경포대는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지 않았다. 다음 태정(泰定) 병인년에 지금 지추부학사 박공 숙(知秋部學士朴公淑)이 관동에서 절월(節鉞)을 잡았다가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임영 경포대는 신라 시대에 영랑 선인(永郞仙人)들이 놀던 곳이다. 내가 이 대에 올라 산수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에 참으로 즐거워하였고, 지금에도 생각에 남아 잊을 수 없다. 누대에 정자가 없어서 풍우를 만나면 유람하는 자가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고을 사람에게 명하여 대 위에다 작은 정자를 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으라.’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박공의 본 바가 여러 사람의 평론하는 바와 같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감히 망령되게 평론하지 못하고, 한번 유람한 뒤에 기문짓기로 생각하였다. 이번에 내가 다행히 왕명을 받들고 이 지방을 진수하게 되어,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를 두루 보았다. 저 국도와 총석의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이 진실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나, 이것은 기이한 형상의 물체일 뿐이었다. 그 후 이 대에 오르니, 담담하게 한가롭고 넓게 트이어 기괴한 형상으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이 없고, 다만 멀고 가까운 산과 물뿐이었다. 앉아서 사방을 돌아보니, 먼 데의 물은 푸른 바다가 넓고 질펀한데 아득한 물결이 출렁거리고, 가까운 데의 물은 경포가 깨끗하고 맑아서 바람 따라 넘실거린다. 먼 데의 산은 골짝이 천 겹인데 구름과 노을이 아련하며, 가까운 데의 산은 봉우리가 십 리인데 초목이 무성하다. 항상 물새와 갈매기가 있어 떳다 잠겼다 하며, 대 앞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다. 그 봄ㆍ가을 연기와 달이며, 아침저녁으로 그늘졌다 개었다 하여 때에 따라 변화하는 기상이 일정하지 않은 바, 이것이 이 경포대 경치의 대략이다.
내 오랫동안 앉아서 가만히 보다가 막연히 정신이 집중됨을 깨닫지 못하였다. 지극한 멋은 한가하고 담담한 중에 있고, 속세를 떠난 생각이 기이한 형상 밖에 뛰어나서, 마음에 홀로 알면서 입으로는 형용할 수 없음이 있었다. 그러한 뒤에 박공(朴公)의 좋아한 바가 기괴한 물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하는 이치의 미묘한 것임을 깨달았다. 옛적에 영랑(永郞)이 이 대에 놀았으니, 반드시 좋아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박공이 좋아한 것도 영랑의 마음과 같은 것인가. 박공이 고을 사람에게 이 정자를 짓도록 명하니, 고을 사람이 다, ‘영랑이 이 대에 놀았으니 정자가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천 년이나 지난 뒤에 정자는 지어서 무슨 소용이랴.’ 하고, 마침내 풍수가의 꺼리는 말로써 고하였다. 그러나 공은 듣지 아니하고 역군을 독촉하여 흙을 깎다가 정자 옛터를 발견하였다. 주추와 섬돌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고을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서 감히 딴 말이 없었다. 정자 터가 이미 오래되어 까마득하고 묻혀지기까지 하여 고을 사람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우연히 발견되었으니, 이 일을 보면 영랑이 오늘날에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전일에 내가 박공의 말을 듣고 그 단서를 알았으나 이번에 이 대에 올라서 그 자세한 것을 상고하고, 인해서 정자 위에 쓰노라.” 하였다.
○ 앞사람 안축(安軸)의 시에, “비 개이니 가을 기운 강성(江城)에 가득하여 조각배 띄워 흥취를 푸노라. 지역은 항아리 속에 들어오는데 티끌은 못 오고, 사람이 거울속에 노는데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려워라. 연파(煙波)에 백조가 때때로 지나가고, 모랫길엔 나귀가 천천히 간다. 뱃사공아 노를 빠르게 젓지 마라. 깊은 밤에 외로운 달 밝은 것 보기를 기다려라.”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대를 쌓아 벽포(碧浦)에 임했으니, 유람하는데 시간 오래됨을 어찌 사양하리. 부서지는 물결은 노래하는 부채를 움직이고, 상서로운 바람은 춤추는 소매에 불어오네. 옥진(玉塵) 들고 하는 이야기는 은하수(銀河水)를 기울인 듯, 은잔에 술은 바다물결처럼 넘실거리네. 아지 못하겠네 선인의 마음이, 지금과 옛적 서로 통할는지.” 하였다.
○ 이곡의 시에, “붉은 깃발에 옹위되어 화성(火城)에 돌아오니, 사신의 놀이가 인정에 알맞았다. 야복(野服)을 입으니 수수하여 좋고, 시편(詩篇)은 선배를 따름이 기쁘구나, 긴 여름해에 바람 쏘이려 난간을 부여잡았고, 깊은 밤에 달빛을 따라 배 가는대로 맡겨둔다. 호수 가운데 어찌하면 경치를 독차지하여, 미친 객 미친 이름이 사명(四明)을 이을고.”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어떤 사람의 시가 사선성(謝宣城)만 하리, 고상한 놀이가 속된 정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노라. 좋은 술이 비었는가 병이 아주 눕고, 맑은 강은 비단 같으니 시구가 이루어지네, 강락(康樂)이 산에 오르던 흥취를 겸할 수 있고, 지장(知章)이 말 타고 가던 것은 반드시 하지 못한다. 달 밝은 거울 같은 호수에 한 구비 남았으니, 내일은 벼슬을 그만두고 배를 타리라.” 하였다.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박혜숙 신(朴惠肅信)이 젊어서부터 명망이 있었다. 강원도 안렴사(按廉使)로 있으면서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하여 애정이 매우 깊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 참인데, 부윤 조석간 운흘(府尹趙石磵云仡)이 홍장이 벌써 죽었다고 거짓으로 고하였다. 박은 슬피 생각하며 스스로 견디지 못하였다. 부(府)에 경포대가 있는데 형승이 관동에서 첫째이다. 부윤이 안렴사를 맞이하여 뱃놀이하면서, 몰래 홍장에게 화장을 곱게 하고 고운 옷을 입게 하였다. 별도로 배 한 척을 준비하고, 늙은 관인(官人)으로서 수염과 눈썹이 희고, 모습이 처용(處容)과 같은 자를 골라 의관을 정중하게 하여, 홍장과 함께 배에 실었다. 또 채색 액자(額子)에다, ‘신라 적 늙은 안상(安詳)이 천 년 전 풍류를 아직 못 잊어, 사신이 경포에 놀이한다는 말 듣고, 꽃다운 배에 다시 홍장을 태웠노라.’라는, 시를 적어 걸었다. 노를 천천히 저으며 포구에 들어와서 물가를 배회하는데, 거문고 소리와 피리소리가 맑고 또렷하여 공중에서 나는 듯하였다. 부윤이 안렴사에게, ‘이 지역에는 옛 선인의 유적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차 달이던 아궁이가 있고, 또 여기에서 수십 리 거리에 한송정이 있고, 정자에 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으며, 지금도 신선의 무리가 그 사이에 오가는데, 꽃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에 간혹 본 사람도 있소. 그러나 다만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 갈 수는 없는 것이오.’ 하니, 박이 말하기를, ‘산천이 이와 같이 아름답고 풍경이 기이하나, 마침 정황이 없소.’ 하면서 눈에 눈물이 가득하였다. 조금 뒤에 배가 순풍을 타고 눈깜박할 동안에 바로 앞으로 왔다. 노인이 배를 대는데 얼굴 모습이 기괴하고 배 안에는 홍기(紅妓)가 노래하며 춤추는데 가냘프게 너울거렸다. 박이 놀라서 말하기를, ‘필연코 신선 가운데 사람이다.’ 하였다. 그러나 눈여겨 보니 홍장이었다. 온 좌석이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고 한껏 즐긴 다음 놀이를 마쳤다. 그 후에 박이 시를 보냈는데, ‘소년 적에 절(節)을 잡고 관동을 안찰할 때, 경포대 놀이하던 일 꿈속에도 그리워라. 대 밑에 다시 배 띄우고 놀 생각 있으나, 붉은 단장과 늙은이가 비웃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 유사눌(柳思訥)의 시에, “기이한 경치 이야기를 듣고 내 말[馬]이 동쪽을 갔더니, 당년의 즐기던 놀이 그림 속일세. 지금 바로 배 타고 가고 싶으나, 대 위엔 석간옹(石磵翁)이 없으리.”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대관령이 공중에 솟아 여러 산의 아비인데, 새끼 산이 동쪽으로 줄기줄기 뻗었네. 줄기가 갈라져서 호수를 감쌌는데, 푸른 멧부리 흰 물결이 서로 머금고 뱉는다. 평평한 호수 십 리인데 물결 고요하니, 거울 빛이 경대에서 나온 듯 갈매기 날아와 눈을 차니, 봄바람에 흰 날개가 펄럭인다. 대는 푸르러 오도(鰲島)를 덮었는데, 지는 해 홍교(虹橋)엔 사람 그림자가 거꾸러졌다. 긴 길 바다에 임했는데, 들 해당화는 찬란하게 푸른 풀에 비친다. 물결은 아득하게 큰 바다에 잇닿았는데, 구름 돛은 만 리에 부상(扶桑) 끝이네. 부상은 어디인가 갈 수 없고, 용퇴(龍堆)와 신각(蜃閣)은 멀리 서로 마주했네. 기이한 구경 훌륭한 경치 어디에 짝 있으리. 이 세상 안에서 제일이 되리라. 동정호(洞庭湖)와 운몽택(雲夢澤)은 공연한 이름일 것을, 제인(齊人)이 자랑하고 초인(楚人)이 풍치지만 우열을 가리기는 어려우리. 선인의 놀이는 이미 먼 세월 구름만이 아득한데, 바람 맑고 달이 밝아 빈 강에 가을이네. 시인과 묵객이 몇이나 오갔나, 해마다 술 싣고 봄놀이가 많았네. 내 걸음은 바로 늦은 봄 3월이라, 산꽃이 어즈러이 떨어져 붉은 비 쏟아지네. 시를 지어 옛일을 생각하고 긴 휘파람 부니, 맑은 바람이 슬슬 불어 푸른 나무 흔드네.” 하였다.
해송정(海松亭) 경포대 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 푸른 바다가 바라보인다.
○ 이구(李玖)의 시에, “풍진 속에 모자를 재켜썼으니, 동서로 헤매는 동안 머리 희었네. 누에 올라 더위를 피하였더니, 경치를 보니 문득 가을이던가. 물고기는 뛰다가 숨기도 하고, 제집 찾는 새는 느리게 난다. 신세를 생각하고 홀로 섰는데, 산 기운이 한창 피어오른다.” 하였다.

쾌재정(快裁亭) 부 동쪽 9리에 있으며, 곁에 이끼낀 비석이 있다. 예전에 병사를 주둔시키던 곳이다. 취원대(聚遠臺) 부 동쪽에 있다. ○ 조운흘의 시에, “성 동쪽 취원대에 걸어 오르니, 들 복숭아 산 살구가 성에 가득 피었다. 세상이 시끄러워 한창 일이 많은데, 묻노니 봄빛이 어데서 왔나.” 하였다. 어풍루(馭風樓) 곧 부성(府城) 동쪽 문루(門樓)이다. 『신증』 척번대(滌煩臺)ㆍ청백당(淸百堂) 모두 객관 서쪽에 있다. 허리대(許李臺) 부 남쪽 25리에 있다. 바닷가에 평평하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백여 사람이 앉을 만하다. 허종(許琮)과 이육(李陸)이 함께 사명을 띠고 여기에 와서 놀았으므로 이름하였다. ○ 이육의 시에, “완악한 모습이 몇 겁 티끌을 겪었는고, 물 위에 하늘로 솟아 홀로 바닷가에 섰다. 상서(尙書)의 붓 아래엔 강물을 쏟는 듯, 대장 깃발 곁엔 일월이 열렸네. 당시 난정(蘭亭)에는 성한 일이라 전해오고, 천년 적벽(赤壁)은 기이한 재사(才士) 힘입었다. 어찌 알랴 길가에 평범한 돌이, 이제부터 허리대(許李臺)라 이름 높아질 것을.” 하였다.
【학교】 향교 부 북쪽 3리에 있다. 동쪽 모퉁이에 항아리 같은 바위가 있으며, 항간에서 연적암(硯滴巖)이라 부른다. ○ 고려 김승인(金承印)이 존무사(存撫使)가 되어, 화부산(花浮山) 밑에다가 처음으로 학사(學舍)를 창설하였다.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중수기〉에, “내가 젊었을 때, ‘강릉의 풍습이 문학을 숭상하여 그들 자제가 겨우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되면, 곧 향교에 들어가 배우고, 시골 구석구석 마을에까지 선비들의 위의가 엄숙하고 조용함은 모두 글을 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란 말을 듣고 아름답게 여겼다. 성화(成化) 임진년 봄에 내가 시어사(侍御史)로서 시원(試院)에 참여하였는데, 유생 3, 4명이 있었다. 얼굴에 고기(古氣)가 있고 의관은 남루하나, 그들의 강설은 매우 정미하고 익숙하였다. 물으니 모두 강릉 사람이었다.
그 후 14년이 지나서 절월(節鉞)을 잡고 관동에 오게 되었다. 처음 임영관(臨瀛館)에 가서 부 이졸의 예를 받은 다음, 여러 학생을 불러서 경서의 뜻을 물으니 마음속에 성현의 뜻을 통한 자가 거의 수십여 명이었다. 또 제목을 내어 문예를 시험하도록 명하였더니, 시부(詩賦)와 의의(疑義)에 합격한 자가 또 50여 명이었다. 이에 또 지난 임진년 시원에서 강하던 자의 학업이 그 유래가 있음을 알았다. 이튿날은 향교에 나아가서 선성(先聖)께 배알한 다음, 물러나서 부사 이인충(李仁忠)ㆍ전승지(前承旨) 박시형(朴始亨)ㆍ도사(都事) 류양춘(柳楊春)ㆍ교수(敎授) 최자점(崔自霑) 등과 의논하고, 역말을 달려보내 조정에 아뢰기를, ‘강릉은 대관령과 바다 사이에 멀리 있으나, 이곳 사람은 예의를 익히고 시서를 외우니, 실상 우리 동방의 추로(鄒魯)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 고을 향교에는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廡)ㆍ서무(西廡)가 있사온데 오랜 세월에 허물어지고 위태하며, 재사(齋舍)도 비좁아 학생을 수용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중수하고 넓히지 않으면 장차 무너져서 지탱하기 어려울까 염려되오며, 강독하는 자들 또한 편안히 거처하지 못할까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사방에 걱정이 없어, 본부(本府)와 삼척(三陟) 두 진의 병졸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냅니다. 이 두 진의 병졸을 이용하여 봄ㆍ여름으로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웠다가, 가을ㆍ겨울이 되거든 집을 짓게 하여 옛것을 새롭게 하며, 좁은 것을 넓혀서 학도들을 장려하기를 청합니다. ‘ 하였다. 윤허를 받은 다음, 곧 군졸을 나누어서 재목과 기와를 모으게 하였다. 일이 되어갈 무렵에 마침 날씨가 가물어서 중지하였다가 그의 완성은 다음 사람에게 미룬 채, 나는 교체되었던 것이다.
그 후 9년 만에 서울에서 최 교수(崔敎授)를 만났는데, 최도 역시 벼슬이 갈려서 사간원 정언이 되었었다. 최의 말이, ‘강릉은 나의 고을입니다. 우리 향교가 중수된 것은 공의 힘입니다.’ 하기에, 나는, ‘아니요, 내가 완성하지 못하고 갈렸으니, 내게 무슨 공이 있겠소.’ 하니, 최는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일은 완성하는 그날에 되는 것이 아니고, 계획하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이 비록 완성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나, 그 자재는 이미 공이 있을 때에 이루어 놓았던 것입니다. 을사년 겨울 공이 갈려 간 다음 해에 대성전과 동무ㆍ서무를 지었고, 또 다음 해에 동재(東齋)ㆍ서재(西齋)ㆍ강청(講廳)을 지었고, 전사청(典祀廳)ㆍ제기고(祭器庫)ㆍ교수아(敎授衙)ㆍ유사방(有司房)까지도 모두 일신하게 하였습니다. 또 다음 해에 남루(南樓)와 앞 행낭, 총 70여 칸을 지었는데 향교로서 크고 화려한 것이 비할 곳이 없습니다. 이어서 완성한 관원은 부사 이평(李枰) 판관 신승복(愼承福)이요, 기와 굽는 것을 감독한 자는 함영창(咸永昌), 집 짓는 것을 감독한 자는 김보연(金普淵)이며, 목수는 안해심(安海深)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이 당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다음 사람인들 어떻게 이 일을 완성하였겠습니까. 여기에서 배우고 여기에서 먹는 자는 모두 감격하고 분발하여, 문학을 숭상하는 풍습이 이에서 더욱 진작하리니, 이것은 그 사적(事蹟)을 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찌 한 말씀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내 말하기를, ‘아, 내가 무슨 공이 있어 감히 말하리오마는, 대저 인재가 많고 학교가 성하게 된 것은 사문(斯文)이 아니면 오는 세대를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했다.” 하였다.

【역원】 대창역(大昌驛) 부 동쪽 5리에 있다. 안인역(安仁驛) 부 남쪽 20리에 있다. 목계역(木界驛) 부 서남쪽 50리에 있다. 고단역(高端驛) 부 서쪽 60리에 있다.
횡계역(橫溪驛) 대관령 위에 있으며, 부치(府治)에서 60리이다. 지대가 매우 높고 서늘하여, 매년 겨울이면 눈이 두어 길이나 쌓였다가 다음 해 3월이라야 비로소 녹는다. 8월이면 서리가 내리므로 주인은 오직 구맥(瞿麥 귀리)을 심는다.
○ 정추(鄭樞)의 시에, “한낮인데도 계정(溪亭)엔 음기가 엉기고, 사시로 서리가 위세를 부리네. 봄인데도 나무에 잎 없음이 괴이하더니, 사람들이, ‘가지 끝엔 밤마다 얼음 언다.’ 말하네.” 하였다.

진부역(珍富驛) 영 서쪽에 있으며, 부의 치소에서 백 리다.
○ 권적(權迪)의 시에, “옛 역 이름이 진부인데, 진부라는 명칭은 무슨 뜻일까. 눈이 무더기 지니 산에 옥(玉)이 가득하고, 버들이 스치니 길에 금이 많아라, 시내에 잉어는 붉은 비단이 뛰는 듯, 마을 연기는 푸른 비단을 흩는 듯하다. 눈앞에 두 호장(戶長)은 귀밑머리가 은실처럼 빛나네.” 하였다.
대화역(大和驛) 영 서쪽에 있다. 부치에서 백 50리다. 방림역(芳林驛) 영 서쪽에 있다. 부치에서 백 70리다. 동덕역(冬德驛) 부 북쪽 42리다.
낙풍역(樂豐驛) 우계현(羽溪縣) 동쪽 5리에 있다.
○ 정추의 시에, “명사(鳴沙)에 말가는 대로 천천히 돌아오는데, 시냇 바람이 비를 몰아 옷을 적시네. 정자 앞 흐르는 물은 바다와 가까운데, 산 밑에 있는 콩밭엔 모종이 드물다.” 하였다.

임계역(臨溪驛) 우계 현 서쪽 40리에 있다.
『신증』 성현의 시에, “평평한 모래톱이 바다에 닿았는데, 돌아갈 길은 아득히 멀기도 해라. 푸른 대는 뒷집을 막았고, 푸른 숲은 판교(板橋)를 가리웠네. 연기 끼인 언덕에는 송아지 몰아가고, 풀 우거진 들판엔 샘물을 멀리 끌어왔네. 뻐꾸기는 절기를 알고, 은근하게 곡식 심기 권하네.” 하였다.
○ 이우(李堣)의 시에, “눈(雪) 빛이 창틈에 드니 촛불이 무색해지고, 달은 솔 그림자에 채[篩]쳐서 서쪽 처마에 일렁인다. 밤이 깊어 산바람이 부는 줄 알겠으니, 담 밖의 대나무에 우수수 소리 나누나.” 하였다.

운교역(雲橋驛) 영 서쪽에 있으며, 부치에서 1백 90리다. 구산역(丘山驛) 부 서쪽 20리에 있다. 정자가 있는데 사람을 서쪽으로 전송하는 곳이다.
○ 조운흘의 시에, “구슬 같은 두 줄기 눈물이 옥잔에 떨어진다. 양관(陽關) 세 가락에 전송할 때여라. 태산이 평지되고 바닷물이 말라야, 이별하는 눈물이 구산에서 없어지리.” 하였다.

홍제원(洪濟院) 부 서쪽 5리에 있으며 사화루(使華樓)가 있다. 제민원(濟民院) 부 서쪽 28리에 있다. 대령원(大嶺院) 대관령 위에 있다. 독산원(禿山院) 부 서쪽 90리에 있다. 인락원(人樂院) 부 서쪽 1백 20리에 있다. 인부원(人富院) 부 서쪽 1백 39리에 있다. 자인원(慈仁院) 부 서쪽 1백 40리에 있다. 장연원(長淵院) 부 서쪽 1백 40리에 있다. 무응구리원(無應仇里院) 부 남쪽 75리에 있다. 장수원(長壽院) 우계현 서쪽 28리에 있다. 대제원(大濟院) 우계현 서쪽 43리에 있다. 송현원(松峴院) 우계현 서쪽 70리에 있다. 『신증』 【교량】 누교(樓橋) 부 남쪽 10리에 있다. 강문교(江門橋) 부 북쪽 12리, 경포 입구에 있다.
【불우】 상원사(上院寺) 오대산에 있다. 사자암(獅子菴) 오대산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건문(建文) 3년 봄 정월 신미일에 계운신무태상왕 전하(啓運神武太上王殿下)께서 내신 판내시부사(內臣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을 시켜 참찬 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신 권근(權近)을 불러 전지하시기를, ‘내가 일찍이 강릉부 오대산이 기이하고 빼어났다는 것이 옛적부터 드날렸음을 듣고, 원찰(願刹)을 세워서 착한 인과(因果)를 심고자 생각한 지 오래였다. 지난해 여름에 운설악(雲雪岳)이라는 늙은 중이 이 산에서 와서 고하기를, 「산 중에 사자암이 있었는데, 국가의 비보사찰(裨補寺刹)입니다. 대(臺)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대에 오르내리는 자가 모두 거쳐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창건한 지 오래되어서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으니, 보는 자가 마음 아파합니다. 진실로 이 암자를 중건한다면 여러 사람의 흔쾌함이 딴 곳보다 반드시 곱절일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곧 공인을 보내 중건하였다. 세 칸은 부처를 봉안하고 중이 우거하는 곳이며, 그 아랫쪽의 두 칸은 문과 목욕간으로 만들었다. 규모는 비록 작으나 지세가 적당하므로 거기에 알맞게 하고자 하여, 사치하거나 크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공사를 마친 다음, 그해 겨울 11월에 친림하여 낙성하였는 바, 대개 세상을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추념(追念)하고 후세에까지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부처의 은덕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을 써서 오랜 후세까지 알게 하라.’ 하시었다.
신 근이 적이 생각하건대 불씨(佛氏)의 도는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것인데, 그 설법은 매우 광대하다. 그러므로 한(漢) 나라 이래로 군주로서 존숭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태상왕전하께서 신무(神武)하신 자질로써 천운에 응해 개국하시어 동방을 보유하고 유신(維新)하는 정사를 베푸시니, 어진 은택이 깊고 두터우며 자손을 위해 남긴 법과 드리우신 복이 지극하다 하겠다. 번거로운 정무를 싫어하시어 사왕(嗣王)에게 전하시고, 불법에 전심하시어 부지런하게 받들고 믿으시어 깊고 높은 산꼭대기의 옛터까지 찾아서 이름 있는 절을 건립하시되 천 리 길도 멀다 않으시고 옥지(玉趾)를 수고롭게 하여 친히 임어(臨御)하시니, 숲과 골짜기는 빛이 더 나고 칡덩굴도 광채가 나니 이 산이 생긴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옛적에 신라 왕자 두 분이 이 산에 들어온 것이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 오는데,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창업하신 임금이시고 태상왕의 존귀한 몸인데 멀리 승여(乘輿)를 움직여 친히 임어하셨으니, 지금으로부터 산골 늙은이들은 이 일을 한없이 일컫고 이 산의 소중함을 더할 것이다. 마땅이 헌원씨(軒轅氏)가 구자산(具茨山)에 놀던 것과, 주목왕(周穆王)이 요지(瑤池)에 갔던 일과 아울러 아름다움을 무궁토록 칭송하리라.” 하였다.

관음암(觀音菴) 오대산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부 동쪽 해안(海岸)에 있다.
○ 이곡의 〈동유기(東遊記)〉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두 석상(石像)은 땅에서 솟아나온 것이라 한다. 동쪽에 사선비(四仙碑)가 있었는데, 호종단조(胡宗旦朝)가 물에 빠뜨려 오직 귀부(龜趺)만이 남았다 한다.” 하였다.
○ 정추의 시에, “고요한 밤에 풍경소리 반공에 울리는데, 단청한 불전에 등불이 붉다. 노승이 우통(于筒) 물을 즐겨 말하는데, 지수(智水)와 어느 것이 묽고 진한고.”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절을 두른 구슬 같은 시내와 옥 같은 봉우리, 청량한 경계가 지금도 예 같다. 공중을 향해 바로 솟음은 솔의 성질을 알겠고, 물(物)에 응해도 항상 공(空)함은 대[竹]의 마음을 보겠다. 바람소리는 자연의 풍악을 울리고, 외로운 구름은 가서 세상 장마가 된다. 사신이 해마다 경치를 찾으니, 연하(煙霞)는 특별히 깊어라.” 하였다. ○ “유인(幽人)이 보산(寶山) 속에 편히 쉬며, 한 줄기 향연으로 임금을 축수한다. 천녀(天女)가 꽃을 흩어 향기가 땅에 덮였고, 야신(夜神)이 나무를 쪼개니 그림자가 공중에 어른거린다. 처마끝 달빛은 붉은 기둥에 흐르고, 베갯가 구름은 푸른 헌함을 스쳐간다. 한밤중 동창에 객이 놀라 잠 깨니, 해가 바다에서 솟구치어 붉은 빛을 쏜다.” 하였다.

염양사(艶陽寺) 화부산(花浮山)에 있다. 이곡의 중수기가 있다.
금옹사(金甕寺) 오대산에 있다. 이첨(李詹)의 중수기가 있다.
흥원사(興原寺) 담정산(淡定山)에 있다.
월정사(月精寺) 오대산에 있다.
○ 정추의 시에, “자장(慈藏)이 지은 옛 절에 문수보살이 있으니, 탑 위에 천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 금전은 문 닫았고 향연이 싸늘한데, 늙은 중은 동냥하러 어디로 갔나.” 하였다.

수정암(水精菴) 오대산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우통물 근원에 수정암이 있다. 옛적에 신라 왕자 두 사람이 여기에 숨어서 참선하여 도를 깨쳤다. 그리하여 지금도 중으로서 수도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 머물기를 즐겨 한다.” 하였다.

등명사(燈明寺) 부 동쪽 30리에 있다.
○ 이곡의 〈동유기〉에, “등명사에 와서 해돋이를 보았다.”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쇠줄친 길이 벽련봉(碧蓮峯)을 둘렀는데, 겹 누각 층층 대가 공중에 솟았다. 그윽한 나무는 그늘져서 여름을 맞이하고, 늦은 꽃은 고움을 남겨서 봄의 조화를 돕는다. 봉간(鳳竿) 그림자는 천 봉우리 달에 걸렸고, 어고(魚鼓) 소리는 만 구렁 바람에 전한다. 고상한 사람이 눈오는 밤에, 화로 재 헤쳐 불 피우던 것이 생각난다.” 하였다.
○ 김돈시(金敦時)의 시에, “절이 창파를 눌러 멀리 아득한데, 올라 보니 바다 복판에 있는 듯하다. 발을 걷으니 대 그림자가 성기면서도 빽빽하고, 베개에 기대니 여울 소리가 낮았다가 높다. 경루(經樓)에 밤 고요한데 향불이 싸늘하고, 객탑(客榻)에 달 밝은데 갈건(葛巾)이 서늘하다. 좋은 경치에 머물 인연 없음이 못내 서글퍼, 종일토록 정신없이 구복(口腹) 위해 바쁘다.” 하였다.

지장사(地藏寺) 보현산(普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부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 서쪽 백 보(百步) 지점에 있다. 여단 부 북쪽에 있다. 김유신사(金庾信祠) 화부산에 있다. 『신증』 지금은 성황사에 합쳤다. 대관산신사(大關山神祠) 부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고적】 창해군(滄海郡) 한(漢) 나라 무제(武帝) 원삭(元朔) 5년에 예국(濊國) 임금 남려(南閭)가 조선(朝鮮)을 배반하고 요동(遼東)에 가서 붙었으므로, 그 지역을 창해군으로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동루(東樓) 용지사(龍池寺)에 있다.
○ 정추의 시에, “대관령 동쪽은 천하에 드문 경치이니, 명주(溟州) 고목에 꾀꼬리 어지러이 나네. 새벽에 말 타고 절 찾아갔다가, 빈관(賓館)에 돌아오니 해가 기우네. 누에 오르니 달빛이 눈 같고, 쇠피리 한 소리에 산이 찢어지는 듯하네. 난간에 기대니 시름에 겨워, 묻노니 천년 동안에 달은 몇 번이나 둥글었나, 밤 깊어서 사방에 인적이 드문데, 까마귀 까악까악 티끌도 고요하다. 별빛은 반짝반짝 달과 겨루고, 은하는 천고에 빛이 환하다. 환한 빛이 사방에 임했는데, 뜬구름이 덮으려니 마음 아파라. 어찌하면 긴 칼로 창공에 기대볼까. 고래 같은 물결이 한없이 아득하네. 화부산은 꾸불꾸불 무성한 빛이어라. 김유신 장군은 참 영웅일세, 천년토록 우뚝하고 기이한 공이여.” 하였다.
○ 고려 김태현(金台鉉)의 시에, “절월(節鉞)을 잡고 난간에 기대 한 해를 보내는데, 바라보이는 것은 온통 흰 갈매기 가득한 하늘이네. 서쪽으로 돌은 멧부리 구름 밖에 솟았고, 동쪽으로 일어나는 물결은 해 가[日邊]에 부서진다. 새벽 모습은 버들잎에 이슬이 깨끗하고, 저문 자취는 댓가지에 연기가 짙다. 다만 몸이 임영관(臨瀛館)에 있는 까닭으로, 약은 짓지 않아도 뼈는 벌써 신선되었다.” 하였다.
○ 윤혁(尹奕)의 시에, “신령이 승지를 숨겨, 몇 천 년 만에 백 척 높은 누가 반공에 솟았다. 붉은 기둥은 멀리 창해 속에 떠 있는 듯, 푸른 처마는 높게 흰 구름가를 스친다. 가을은 성곽 무성한 나무에 깊고, 해는 들판 담담한 연기에 진다. 아전이 가고 뜰이 비어 아주 깨끗한데, 낮은 소리로 월중 항아(月中嫦娥)를 부르고 싶다.” 하였다.

예국고성(濊國古城) 읍성(邑城) 동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4백 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우계산성(羽溪山城) 현 북쪽 5리에 있으며, 부에서는 61리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4백 51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보현산성(普賢山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1천 7백 7척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석조(石竈)ㆍ석지(石池)ㆍ석정(石井) 모두 한송정 곁에 있으며, 네 선인(仙人)이 놀이할 때 차를 달이던 도구였다.
양어지(養魚池) 세상에 전해오기로, “한 서생이 유학(遊學)하면서 명주(溟州)에 왔다가, 자태가 아름다운 양가(良家) 여자를 보았는데 제법 글을 아는 것이었다. 서생이 매양 시를 지어 부추기니, 그 여자가, ‘부인네는 함부로 남을 따르지 않습니다. 학생이 과거에 뽑히기를 기다려서 부모의 말씀이 계시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서생은 곧 서울에 돌아가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그 여자는 못에 고기를 길렀는데, 고기들이 그 여자의 기침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몰려 와서 먹이를 먹었다. 그 후에 여자의 집에서 신랑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여자는 고기에게 먹이를 주면서, “내가 너희들을 기른 지가 오래이니, 나의 뜻을 알 것이다.” 하며, 비단에 적은 편지를 던졌다. 큰 고기 한 마리가 펄쩍 뛰면서 그 편지를 삼키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서생이 서울에 있으면서, 하루는 부모에게 드릴 찬을 장만하기 위하여 고기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고기뼈를 가르다가 비단에 적은 편지를 발견하여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곧 비단 편지와 자기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바로 그 여자의 집에 가니, 신랑이 벌써 그 집 문에 와 있었다. 서생이 편지를 그 여자의 집에 보이니, 그 부모도 이상하게 여기며, ‘이것은 정성이 고기를 감동하게 한 것이고, 사람의 힘으로써는 될 것이 아니다.’ 하고 그 신랑을 보내고 서생을 맞이하였다.” 한다.
개운루(開雲樓) 객관 동쪽에 있다. 연못 복판에다 대를 쌓았고 대 위에 다락을 세웠던 것이나, 지금은 없어졌다.
○ 조운흘(趙云仡)의 시에, “뜰 위에 풀빛이 파릇파릇한데, 버들 그늘진 관도가 깨끗도 하다. 누구네 집 남은 꽃이 떨어지는가, 조각조각 바람따라 말굽에 든다.” 하였다.

사동부곡(史冬部曲) 부 남쪽 20리에 있다. 오홀부곡(烏忽部曲)ㆍ조대산부곡(助大山部曲)ㆍ소점부곡(蘇漸部曲), 반곡소(般谷所) 부 동쪽 6리에 있다. 죽원소(竹原所)ㆍ영평수(寧平戍), 해령수(海令戍) 부 동쪽 10리에 있다. 화성수(化城戍), 사화수(沙火戍) 부 북쪽 20리에 있다. 철옹수(鐵甕戍).
【명환】 신라 이사부(異斯夫) 내물왕(奈勿王)의 4대 손(孫)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 때에 하슬라(何瑟羅)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합병하기로 꾀하였다. 그 나라 사람이 어리석으나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니, 계략으로써 항복받는 것이 옳다 하여, 나무로 가짜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가서 속이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진주(眞珠) 선덕왕(善德王) 8년에 사창(沙滄) 진주에게 이 지역을 진수하게 하였다.
고려 임민비(林民庇) 명주 원으로 와서, 도랑을 파서 전답에 물을 대었으며, 청렴하고 근면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조정에 들어가서 태상부 녹사(太常府錄事)가 되었다. 안종원(安宗源) 공민왕(恭愍王) 때에 신돈(辛旽)에게 미움을 받아서 부사가 되어 나왔다. 박원계(朴元桂) 존무사(存撫使)로 있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려는데, 재상이, “강릉 사람은 원계가 존무사로 있는 것을 편하게 여긴다.” 하여 그대로 눌러 있게 되었다. 백성이 지금까지 사모하여 마지않는다.
본조 조운흘(趙云仡) 호는 석간(石磵)이다. 건국 초기에 부사가 되었다. 빈객 접대하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청백하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괴이한 짓을 하기를 좋아하여 경포액자시(鏡浦額字詩) 같은 등류가 많았다. 하루는 부 기생들이 석상에서 서로 희롱하여 웃는 것이었다. 석간이 그 까닭을 물으니 한 기생이 답하기를, “첩의 꿈에 사또를 모시고 잤는데 지금 여러 동무와 해몽하는 중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석간이 곧 붓을 찾아 들고, “마음이 영서(靈犀)같이 뜻이 서로 통했으니, 비단 금침을 함께 할 것까지도 없다. 태수의 풍정이 박하다 말아라. 먼저 가인(佳人)의 꿈속에 들었도다.” 하였다. 신유정(辛有定) 우리 태종(太宗) 때에 왜놈이 강원도에 침입하므로 유정에게 금군(禁軍)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고, 그대로 강릉 부사로 삼았다. 청렴하고 어질며 민폐를 없애고 생계를 일으키니, 백성이 그 혜택을 사모하였다. 유량(柳亮) 영부사(領府使)로 있었다. 부의 백성들이 그의 어진 정사에 감격하여, 조운흘ㆍ안종원ㆍ신유정과 함께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제사하였다. 금유(琴柔) 세종 때에 부사가 되었다. 순리(循吏)라는 칭송을 받았고 백성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사모하였다.
『신증』 이신효(李愼孝) 부사가 되어 청렴하고 간편한 정사를 숭상하였다.
【인물】 신라 김주원(金周元) 태종왕(太宗王)의 손자이다. 당초에 선덕왕(宣德王)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지를 받들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왕족 상대장등(上大長等) 경신(敬信)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주원은 화를 두려워하여 명주로 물러가고 서울에 가지 않았다. 2년 후에 주원을 명주군 왕으로 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ㆍ근을어(斤乙於)ㆍ울진(蔚珍) 등 고을을 떼어서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자손이 인하여 부(府)를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김종기(金宗基) 주원의 아들인데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김정여(金貞茹) 종기의 아들이다. 비로소 조정에 벼슬하여 상대등(上大等)에 이르렀고, 명원공(溟源公)으로 봉함을 받았다. 김양(金陽) 정여의 아들이다. 김명(金明)의 반란 때에 신무왕(神武王)을 도와서 사직을 안정시켰다. 벼슬이 시중 겸 병부령(兵部令)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명원군 왕으로 봉하게 되었다.
고려 김상기(金上琦) 주원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시랑 평장사(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선종(宣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인존(金仁存) 상기의 아들이며 처음 이름은 연(緣)이다. 성품이 명철하고 민첩하여 젊었을 때 과거에 올라서,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있다가,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기거사인 지제고 병부원외랑(起居舍人知制誥兵部員外郞)이 되었다. 요(遼) 나라 사신 맹초(孟初)가 왔을 때에 인존이 접반하게 되었다. 하루는 함께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가게 되었다. 눈[雪]이 비로소 개었고 말발굽이 땅에 부딪칠 적마다 소리가 났다. 맹초가 창(唱)하기를, “말굽이 눈을 밟으니 마른 우레가 동한다.” 하였다. 인존이 그 소리에 따라 곧,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니 열화(烈火)가 난다.” 하였더니, 초가 깜짝 놀라면서, “진실로 천재로다.” 하였다. 벼슬은 수태부 문하시중(守太傅門下侍中)까지 하였다. 김고(金沽) 인존의 아우이다. 풍채가 깨끗하고 고우며 문학으로써 세상에 저명하였다. 벼슬은 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최수황(崔守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첨의 찬성사(僉議賛成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의식이 모자라도 개의하지 않았다. 김진(金縝) 학업에 힘을 써서 과거에 올라 인종 때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있었다. 이자겸(李資謙)의 난리에 궁궐이 연소되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적의 손에 죽기보다는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 하고, 문을 닫고 불속에 들어가 죽었다. 난리가 평정되자 그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서 시호를 열직(烈直)이라 하였다. 왕순식(王順式) 본주의 장군이 되어서 태조(太祖)가 신검(神劍)을 토벌할 때에 순식은 명주에서 그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서 격파하였다. 태조가 순식에게 이르기를, “짐의 꿈에 이상한 중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더니, 그 이튿날에 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우니 이것이 꿈의 감응이다.” 하니 순식이 아뢰기를, “신이 명주에서 출발하여 대현(大峴)에 오는데 이상한 절이 있으므로 제사를 베풀어 기도하였더니, 임금께서 꿈꾸신 것은 반드시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태조는 기이하게 여겼다. 최유(崔濡) 본부 아전으로서 사람됨이 거룩하고 풍채가 있었다. 19세 때 과거에 올라 교서 교감(校書校勘)에 보임되었고, 인종 때에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에 이르렀다.
김천(金遷) 본부 아전이다. 고종 말년에 몽고 군사가 침입하여서 어미와 아우 덕린(德麟)이 포로가 되었다. 그때 천은 15살이었는데,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포로된 사람이 도중에 많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는 최복(衰服)을 입고 예제(禮制)를 마쳤다. 그 후 14년 만에 백호 습성(百戶習成)이 원(元) 나라에서 와서, 천의 어머니 편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천은 어미가 북주 천로채(北州天老寨)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보았다. 백금(白金) 55냥으로써 속(贖)을 바쳐서 돌아오게 하였고, 그 후 6년 만에 덕린 또한 돌아왔다. 형제가 종신토록 효도를 다하니, 고을 사람이 돌을 세우고 효자리(孝子里)라 새겨서 정표하였다. 왕백(王伯) 본래 성은 김(金)이며 신라 무열왕의 후손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올랐고 규정(糾正)을 거쳐 우사보(右司補)로 전직되었으나, 임금에게 귀염받는 사람의 첩이 고신(告身)을 서경(署經 고을 원이 부임할 때 상신(相臣)ㆍ장신(將臣)ㆍ육경(六卿) 들에게 고별하는 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참소를 만나 장류(杖流)되었다. 충혜왕 때,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전주로 돌아갔다. 김광을(金光乙) 주원(周元)의 후손이다. 공민왕 때에 찬화공신(贊化功臣)이란 호(號)를 받았다. 명원부원군(溟源府院君)으로 봉하게 되었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최안소(崔安沼) 공민왕 때 순성 보리 공신 강릉군(純誠輔理功臣江陵君)으로 봉하게 되었다.
본조 김추(金錘) 광을(光乙)의 아들이며 벼슬은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함부림(咸傅霖) 과거에 두 번 올랐으며, 개국 공신으로서 동원군(東原君)으로 봉하게 되었다. 국조(國朝)에 8도 감사(八道監司)를 지낸 사람은 부림뿐이며, 간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유창(劉敞) 개국 공신이며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이다. 최이(崔迤)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희경(僖景)이다. 최치운(崔致雲) 세종조(世宗朝)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함우치(咸禹治) 부림의 아들이다. 여러 도의 관찰사를 지냈고 그 아버지의 기풍이 있었다. 벼슬이 의정부 참찬에 이르렀으며 동원군(東原君)에 습봉(襲封)되었다. 김자견(金子鏗)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신증』 최응현(崔應賢) 치운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이성무(李成茂) 어머니가 병들어서 한겨울에 생선을 생각하므로, 성무는 아우 춘무(春茂)ㆍ선무(善茂)ㆍ양무(良茂)와 함께 냇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생선을 구하였다. 그런데 얼음이 갑자기 풀리면서 고기가 뛰어 나왔다.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서 그의 자손을 복호(復戶)하였다. 양무의 아들 중원(仲元)은 과거에 올랐다.
『신증』 박수량(朴遂良) 연산(燕山)이 상기(喪期)를 짧게 하는 제도를 시행할 때에 수량이 어머니의 상을 만났다. 그러나 수량은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고 여묘(廬墓)하였으니, 지금 임금 3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최응록(崔應祿) 아버지가 미친병에 걸렸다.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게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려하였다.
『신증』 【열녀】 본조 김씨 생원 최세창(崔世昌)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곡하고 울부짖으며 지극히 슬퍼하였고, 복을 마치고도 오히려 조석 전(奠)을 폐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려하였다. 이씨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아내이다. 남편이 병이 위독하자, 이씨는 은밀히 선조의 무덤에 가서 분향하고 기도한 다음 칼을 뽑아 손가락을 끊고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이씨에게 작은 딸이 있었는데 하늘에서 크기가 대추만한 약을 내려 주는 꿈을 꾸었더니, 남편의 병이 과연 나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닭 울기 전 새벽 날이 밝다. 김극기의 시에, “모래 위로 몇 리를 가서, 곡구(谷口)의 외로운 성(城)에 이르렀네. 기러기 나는 밖으로 변성(邊城) 구름이 어둡고, 닭 울기 전에 새벽 날이 밝다. 물에는 차가운 거울빛이 깔렸고, 솔에는 성낸 물결 소리가 부서진다. 사제(沙堤)의 시구를 바치고자 하나, 재주가 이영(李嶸)을 압도할 수 없네.” 하였다. 물을 따라 모래톱을 뚫는다. 앞사람의 시에, “손에 천상(天上)의 조칙(詔勅)을 받들고, 사신 수레를 명주(溟州)에 쉬었다. 일이 끝나 유막(柳幕)을 하직하고, 말을 몰아 문득 수레를 돌린다. 얼핏 들으니 바닷가는, 경치가 놀이하기에 족하다지. 놀기 좋아하는 마음 아직도 다하지 않아서, 흥을 따라 깊이 찾고자 한다. 북쪽으로 돌아갈 길을 잊고서, 남으로 가니 참으로 유유하구나. 언덕을 따라 돌층계를 지나고, 물을 따라 모래톱을 뚫는다. 나무마다 검은 원숭이가 매달렸고, 물결마다 흰 갈매기가 펄럭인다. 이리저리 돌면서 마음대로 찾고 구경하니, 만 가지 형상(形象)이 눈을 흔들리게 한다. 네 선인이 지금은 어디에 있나. 다만 묵은 자취만 남았구나. 정자는 시내 어귀에 있고, 절은 고개 위에 솟았다. 걸음마다 속된 경계는 멀어지고, 구름과 노을만 사방에 둘렸네. 상쾌하게 해 그림자를 넘어서서, 난새를 타고 봉산(蓬山)을 방문함 같구나. 문득 바라보니 나는 새 너머에 먼 멧부리가 푸르렀다. 오대산인 줄 물어서 알았는데, 공중에 푸른 용이 서린 듯하다. 문수봉(文殊峯)은 깨끗한 거울이 둥글하고, 백월봉(白月峯)은 맑은 물이 쏟아진다. 신심(信心)이 경건할 것 같으면, 소원은 낱낱이 이루어진다. 신령스러운 지경에 가서, 성군(聖君)의 천만세(千萬歲)를 축원함을 어찌 사양하리.” 하였다.
땅이 부상(扶桑)과 가까우니 날이 새기 쉽고 이색의 시에, “땅이 부상과 가까우니 날이 새기 쉽고, 산은 장백산(長白山)과 닿아서 여름인데 오히려 춥다.” 하였다. 신기루 공중에 떠서 멀리서 바라보니 연기와 같네. 고려 송인(宋因)의 시에, “물결소리가 땅을 움직여 베개에 와서 시끄럽고, 신기루가 공중에 떠서 멀리서 바라보니 연기와 같네.” 하였다. 길은 흰 새 앉은 물가로 돌았고 정추의 시에, “길은 흰 새 앉은 물가로 돌았고, 집은 까마귀 돌아가는 낙조(落照)가에 있다.” 하였다. 큰 물결 땅을 말아오는데 봉래ㆍ영주 가깝고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큰 물결 땅을 말아오는데 봉래ㆍ영주 가깝고, 높은 영(嶺)은 하늘을 만질 듯 태산(泰山)인가 화산(華山)인가.” 하였다. 흰모래 푸른 대나무 물가의 섬은 앞사람의 시에, “깃발도 선명하게 물결에 비치니, 자고(鷓鴣) 새가 놀라 날아서 해당화 떨어진다. 흰모래 푸른 대 물가 섬은, 송교(松喬) 제자의 집인가 의심된다.” 하였다. 고기 잡는 배 푸른 물결에는 만고의 연기 이인복(李仁復)의 시에, “호해(湖海)에 벼슬살이하며 흐르는 세월을 느낀다. 은혜가 박(薄)하니 두 하늘 있다고 누가 말하나. 가을 원(院)은 제비 돌아간 뒤에 비었고, 저문 산은 날아간 갈가마귀 가에 멀다 베 짜는 깊은 골목에는 3경의 등잔이요, 고기 잡는 배 푸른 물결에는 만고의 연기로다, 경포(鏡浦)와 송정(松亭)이 나를 머물게 한다면, 봉래(蓬萊)섬에 다시 신선을 찾지 않으리.” 하였다.
강릉에 날이 따뜻하여 꽃이 먼저 피었네. 권적(權迪)의 시에, “강릉에 날이 따뜻하여 꽃이 먼저 피고, 풍악(楓岳)에 기후가 추워서 눈이 녹지 않았다.” 하였다. 살구꽃 울타리 떨어지니 일천 집에 비가 오고 고려 송천봉(宋天逢)의 시에, “살구꽃 핀 울타리 떨어지니 일천 집에 비가 오고, 풀빛 냇가에는 십 리에 연기가 끼었다.” 하였다. 임영은 물에 떠 있고 물은 하늘에 떠 있다. 박진록(朴晉祿)의 시에, “절월(節鉞)을 안고 풍속을 살핀 지 벌써 2년, 임영은 물에 떴고 물은 하늘에 떠 있다. 벼슬살이는 금오(金鰲 신선 있는 산) 꼭대기에 있는 듯하고, 시안(詩眼) 백조 나는 곳에 더욱 밝구나. 헌함과 문은 동해의 해를 일찍 맞이하고, 발과 깃발은 북산(北山) 연기에 반쯤 젖었네. 곁의 사람은 썩은 선비인 줄 알지 못하고, 서원(西垣)에서 세상을 즐기는 신선이라 이르리라.” 하였다. 수루(戍樓)에 해가 저물어 화각을 재촉하네.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수루(戍樓)에 해가 저물어 화각을 재촉하고, 봉화(烽火)가 전하여 바다산[海嶠]에는 낭연(狼煙)을 진압한다. 난간에 기대서 멀리 바라매 삼신산이 아득하니, 도리어 세상 밖에 노니는 신선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낙락한 한송은 푸른 연기에 잠기었다. 황희(黃喜)의 시에 “맑고 맑은 경포 물엔 새 달이 잠겼고, 낙락한 한송은 푸른 연기에 잠겼다. 구름비단 연꽃은 못에 가득하고 경포대엔 대나무가 가득하니 티끌 세상에도 해중(海中) 신선이 있다.” 하였다. 큰 영[大嶺]에는 구름이 기러기 나는 변방에 연하고 유효통(兪孝通)의 시에, “부상(扶桑)의 해는 바다물결 속에서 돋고, 큰 영에는 구름이 기러기 나는 변방에 연했다.” 하였다. 아득한 성은 말과 같고 하연(河演)의 시에, “까마득하게 성은 말[斗] 만하고 아득한 물은 하늘에 닿았다.” 하였다. 바다 산이 모두 도화원 속일세. 안성(安省)의 시에, “나라가 주(州)로 변한 햇수도 알지 못하겠는데, 예성 누관(蕊城樓館)에 또 가을 절후이다. 바다와 산이 모두 도원(桃源)인데, 무엇하러 구구하게 신선을 배우려 하리.” 하였다.
팔영김극기의 시. 녹균루(綠筠樓) 나는 녹균루를 사랑하노니, 찬 소리가 항상 가을을 흔드네. 삐죽삐죽 칼날이 섰고, 사각사각 구슬이 운다. 아래에서 숙야(叔夜)가 취하기에 좋고, 사이에는 군유(君猷)가 지나가기에 알맞다. 부러워라 그대가 비바람 치는 밤에 베개에 기대서, 우수수하는 소리 듣는 것이. (작자 자신의 주(註) 소동파(蘇東坡)가 서군유(徐君猷)의 만장(輓章) 시(詩)에 “눈 온 뒤에 버들 심은 곳에 홀로 오고, 대 사이에 다니며 다시 차를 캐더니," 하였다.) 한송정(寒松亭) 나는 한송정을 사랑하노니, 높은 풍치가 은하에 닿아 푸르다. 옥깃대를 세운 듯, 구슬비파를 울리는 듯하다. 푸른 꽃순은 빗속에 더 빼어나고, 누른 꽃은 바람따라 다시 향기롭다. 네 선인이 놀이하던 곳, 절경을 찾아 늙음을 위로한다. 경포대(鏡浦臺) 서늘한 경포대에 물과 돌이 다투어 둘렀네. 버들 언덕엔 푸른 연기 합쳤고, 모래 언덕에 흰 눈이 무더기 졌다. 고기는 상점(象簟)을 불며 가고, 새는 교반(鮫盤)을 떨어트려 온다. 선인은 아득하게 어디로 갔나, 땅에는 푸른 이끼만 가득하다. 굴산종(崛山鐘) 용용(舂容)한 굴산종은, 범일선사(梵日禪師)가 만든 것이다. 보고 놀라서 마음이 당황하고, 진중하게 경례하며 눈물 흩뿌린다. 귀신은 다만 도(道)를 행하고, 새들은 발붙이기 어렵다. 그대는 행여 치지 말라, 동해에 어룡이 놀랄까 한다. 안신계(安神溪) 한 줄기 안신계, 깨끗하기 은하와 같다. 오직 비둘기가 물을 머금고, 다시 메기가 진흙을 토함은 없다. 달빛이 비치니 보탑(寶塔)이 빛나고, 연기가 덮이니 향휴(香畦)에 몽롱하다. 아련한 신선의 지경에, 가도가도 길은 아득하여라. 불화루(佛華樓) 한 무더기 불화루에, 여가를 만들어 유람하였더니, 침향(沈香) 화로엔 구름이 아련하고, 찻잔에는 눈[雪]이 부글거린다. 헌함에 엎드려 황곡(黃鵠)을 엿보고, 물에 임해서 백구(白鷗)와 친한다. 고요하게 진세와 떨어졌으니, 무엇하러 신선을 다시 찾으리. 문수당(文殊堂) 고개 위 문수당은, 채색 들보가 공중에 솟았네. 조수는 묘한 소리를 울리고, 산 달은 자애 어린 빛이 흐른다. 구름은 돌다락 가에 불어 나오고, 물은 소나무 길가를 씻는다. 앉아서 보니 숲 너머 새가 꽃을 머금고 날아오네. 견조도(堅造島) 바다 속 견조도는, 높고 험해서 풀 한 포기 없다. 훌륭한 경계는 신선과 가깝고, 남은 자취는 부로에게 전해 온다. 멀리 귀양 와서 종을 치게 되고, 숨어 살며 도를 깨쳤다. 팔을 펴면 천 보(千步)가 넘는다는데, 이 말을 진정 누가 보증하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관찰부를 두었다가 33년에 없애고 군으로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효종(孝宗) 조에 현(縣)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정종(正宗) 6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5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남일리면(南一里面) 끝이 10리. 남이리(南二里) 끝이 15리. 북일리(北一里) 끝이 10리. 북이리(北二里) 끝이 10리. 덕방(德方) 남으로 끝이 10리. 구경(邱耕) 남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80리. 가자곡(可資谷) 위와 같다. 우계(羽溪) 남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90리. 임계(臨溪) 서남으로 처음은 70리, 끝은 1백 20리. 성산(城山) 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 하동(下洞) 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가남(嘉南) 북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사화(沙火) 북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25리. 연곡(連谷) 북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신리(新里) 북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60리. 도암(道巖) 북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70리. 내면(內面) 서북으로 처음은 1백 60리, 끝은 2백 리. 대화(大和) 서쪽으로 처음은 1백 40리, 끝은 2백 리. 진부(珍富) 서쪽으로 처음은 80리, 끝은 1백 20리. 사각부곡(史各部曲)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선명소(船名所) 동으로 6리에 있다.
【성지】 청학산고성(靑鶴山古城) 산 동쪽에 있는데 둘레는 1천 2백 척이다. 고려 덕종(德宗) 3년에 명주성(溟州城)을 수리하였다. 안인포진(安仁浦鎭) 동남으로 20리에 있고 수군만호를 두었는데, 성종(成宗) 21년에 양양대포(襄陽大浦)로 옮겼다. 연곡포(連谷浦)ㆍ주문진(注文津)ㆍ오진(梧津) 남으로 90리에 있으며 이상 세 곳에는 척후(斥候)를 두었다.
【창고】 동창(東倉) 임계면(臨溪面)에 있다. 서창(西倉) 진부면(珍富面)에 있다. 우계창(羽溪倉)ㆍ연곡창(連谷倉)ㆍ대화창(大和倉)ㆍ내면창(內面倉) 1백 30리에 있다.
【토산】 석이버섯ㆍ지실(枳實)ㆍ종유석[石鍾乳]ㆍ하수오(何首烏 감자의 일종)ㆍ참가사리[細毛]ㆍ김.
【궁실】 선원각(璿源閣)ㆍ실록각(實錄閣)ㆍ사고(史庫) 모두 오대산(五臺山) 상원암(上元庵)에 있는데, 선조(宣祖) 39년에 새로 인쇄한 사조실록(思朝實錄)을 이곳에 두었다. ○ 참봉 2인을 두었다.
【묘전】 집경전(集慶殿) 경주로부터 이곳으로 옮기고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으며 참봉 두 사람을 두었다. 인조 6년에 불에 타 없어졌다.

[주D-001]고신(告身) : 현대의 관리 자격증과 같은 것인데, 그때의 경우에는 이 사람은 문서관리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간원(諫院)에서 증명하여야 임용하게 되었다.
[주D-002]습봉(襲封) : 국가에 어떤 공로가 있는 사람은 공신(功臣)이라 하여 군(君)을 봉하게 되었는데, 그 공신의 장손으로 벼슬이 종2품(從二品) 이상에 승관되면 그 조상의 군(君)을 습봉(襲封)하는 법이다.
[주D-003]송교(松喬) : 적송자(赤松子)와 왕자교(王子喬) 두 사람을 가리킨다. 모두 옛날의 신선이다.
[주D-004]도원(桃源) : 진(晉) 나라 말년에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있는 유토피아이다. 깊은 산속에 있어 세상과 아무런 접촉이 없는 곳이요, 산과 들이 모두 복사꽃으로 덮여있다 하여서 도화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주D-005]숙야(叔夜) : 진 나라의 해강(稽康)의 자이다. 그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그들은 대밭에서 술을 마시며 청담을 즐겼다.
[주D-006]상점(象簟)을 …… 온다 : 상점의 점(簟)은 돗자리인데, 상아(象牙)를 가늘게 쪼개서 만든 돗자리라는 말이요, 교반의 교(鮫)는 원래가 상어인데, 예전에는 진주를 교주(鮫珠)라 하였다. 교반이라 함은 진주소반이란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익성 (역) ┃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