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ref="#"></a>
<a href="#"></a>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Image of Original Text 
확대 원래대로 축소
 경상도(慶尙道)
김산군(金山郡)
[DCI]ITKC_mk_g012_004_2000_01450_XML DCI복사 URL복사

동쪽 개령현(開寧縣) 경계까지 12리, 남쪽으로 지례현의 경계까지 41리, 서쪽으로 충청도 황간현(黃澗縣)의 경계까지 41리, 북쪽으로 상주의 경계까지 34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금산현으로 개녕군의 영현이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경산부(京山府)에 이속(移屬)되었고, 공양왕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의 공정왕(恭靖王) 때에 어태(御胎)를 묻었으므로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금릉(金陵).
【성씨】 본군 전(全)ㆍ김(金)ㆍ백(白)ㆍ이(李). 어모(禦侮) 박(朴) 정(鄭)ㆍ방(方)ㆍ오(吳)ㆍ전(田)ㆍ심(沈)ㆍ신(申) 모두 속성(續姓)이다. 황(黃)ㆍ김(金) 모두 내성(來姓)이다. 조마(助馬) 임(林). 영명(迎命) 권(權)ㆍ김(金)ㆍ강(姜)ㆍ이(李)ㆍ장(張)ㆍ백(白). 황금(黃金) 이(李)ㆍ전(田)ㆍ김(金), 주(朱)ㆍ문(文) 모두 속성(續姓)이다.
【산천】 오파산(五波山) 군의 동쪽 1리에 있는 진산이다. 황악산(黃嶽山)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공정왕 때에 어태(御胎)를 산 동쪽 직지사(直旨寺)의 북쪽 봉우리에 안장하였다. 속문산(俗門山) 군의 북쪽 37리에 있다. 고산(高山) 군의 서쪽 35리에 있다. 이 산의 북쪽은 곧 상주의 공성(功城) 및 중모(中牟)의 2현이다. 극락산(極樂山) 군의 서북쪽 11리, 황간현의 경계에 있다. 흑운산(黑雲山) 군의 북쪽 31리에 있다. 병점(餠岾) 군의 남쪽 11리에 있다. 고성산(高城山) 군의 남쪽 9리에 있다. 좌현(左峴) 속문산 동쪽 선산부의 경계에 있다. 괘방현(卦方峴) 군의 서쪽 15리, 황간현의 경계에 있다. 감천(甘川) 군의 동남쪽 11리에 있다. 곧 지례현의 감천의 하류로서 동쪽으로 흘러 개령현의 경계로 들어간다. 직지천(直旨川) 근원이 황악산에서 나와 군의 남쪽 5리를 지나 동쪽으로 흘러 감천으로 들어간다. 연화지(鳶嘩池)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토산】 은어[銀口魚]ㆍ송이[松蕈]ㆍ산무애뱀[白花蛇]ㆍ지황ㆍ꿀[蜂蜜]이다.
【성곽】 속문산성 돌로 쌓았고, 둘레가 2천 4백 50자, 높이가 7자다. 안에 샘 2개, 못 2개가 있다. 군사 창고도 있다.
【봉수】 고성산 봉수 남쪽은 지례현의 귀산(龜山)에, 서쪽은 충청도 황간현 눌이항산(訥伊項山)에 응한다. 소산(所山) 봉수 군의 북쪽 29리에 있다. 동쪽은 개령현 감문산(甘文山)에, 북쪽은 상주 회룡산(回龍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동헌(東軒) 조위(曺偉)의 〈중수기〉에, “금산은 신라 때에는 개령의 영현이었는데, 고려 때에 경산부(京山府)에 이속되고 공양왕 때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 와서는 공정대왕의 어태(御胎)를 안치하였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역대의 연혁 변동이 많았으나 땅이 경상도와 충청도의 갈리는 곳에 놓여 있어, 청주(淸州)를 경유하는 일본사신과 우리나라 사신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므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尙州)와 맞먹을 정도로 왕래의 요충지다. 본래 있던 관청건물은 좁고 낮아 여름에 무덥고 답답했다. 오는 손님들이 시루 안에 들어앉은 것처럼 답답하고 괴로워하였다. 성화(成化) 기해년 가을에 병조 정랑(兵曹正郞) 파산(巴山) 이인형(李仁亨) 공이 이곳에 원으로 오자, 정치가 잘되고 백성은 혜택을 입어 폐단은 없어지고, 이로운 점은 흥하여 다스림이 온 도의 으뜸이 되었다. 4년이 지난 임인년에 향리의 부로들을 불러 이르기를, ‘관사(館舍)를 마련하는 것은 귀한 손님을 접대하고 왕명을 존중하기 위함이다. 이 고을은 지은 지 오늘까지 1백여 년이 되어 허물어진 곳이 반이 다 될 뿐 아니라 서늘한 누대와 높은 정자가 없어 손님을 모시고 올라가 볼 만한 곳이 없으니, 이 어찌 관리들만의 걱정이겠는가. 당신들 부로(父老)들의 수치이기도 하므로 새로 짓고자 한다.’ 하니, 부로들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사실을 갖추어 감사에게 상신하여 허락을 받고, 재목을 모으고 공사를 진행함에 있어, 한 사람의 백성도 번거롭히지 않고, 놀고 있는 사람들로 옛터를 넓혀서 지었다. 그 규모는 대마루와 서까래가 높직하고 짜임새가 치밀하며, 안의 온돌방과 바깥 담장에는 붉은 흙으로 곱게 바르고 화초도 심었는데, 착공한 지 겨우 반년 만에 준공되었다. 지난날의 좁던 것이 넓고 훤하여지며, 낮던 것이 높직하고 시원하게 되었다. 비록 누대는 없고 정자도 없으나, 지형이 높고 탁 트여서 전망이 매우 좋다. 겹겹이 싸인 멧부리는 책상머리에 읍하고, 우거진 숲과 풀이 무성한 들은 발을 드리운 창에 와서 비친다. 바람은 시원하고 새들은 지저귀면서 드나드니, 그윽하고 조용하고 깨끗하고 산뜻한 정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속세에서 벗어난 느낌을 가지게 한다. 향리의 부로들이 모두 모여서 뜰에서 축하하며 공의 덕을 칭송하고 그의 공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갑진년 여름에 내가 사명을 받들고 남쪽에 와서 어버이에게 문안드리고, 이어 군에 나아가 공에게 뵈니, 공이 새로 지은 동헌에 앉아 술잔을 들면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우리의 공사가 끝나자마자 때를 맞추어 그대가 왔으니, 일의 전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민멸되지 않게 해달라.’ 하였다. 나는 생각하니, 관우(館宇)의 흥폐로써 한 고을의 성쇠를 알 수 있으며, 한 고을의 성쇠로써 세도(世道 형편)의 성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군은 신라, 고려를 거쳐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항상 속현(屬縣)으로서 땅은 좁고 백성은 분주한 일에 지쳤었는데, 이제는 큰 군으로 승격되어 인구가 늘고, 밭과 들의 넓어짐이 전의 배가 되었다. 감무를 둔 이래로 전후 몇 사람이 와서 다스렸으나, 공의 현명함이 가장 드러났다. 정사는 공평하고 송사는 사리에 맞아서 집집마다 글읽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심지어는 관우가 헐어서도 고치지 않던 것을 이제 모두 새로 지었으니, 세도의 성쇠는 한 고을의 성쇠를 보아 알고, 한 고을의 성쇠는 관우의 흥폐를 보고 안다는 사실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일본국의 사자로서 연이어 여기에 오는 자는 반드시 지금 달라진 광경을 보고 놀랄 것이며, 더욱 조정의 정치가 전에 비하여 점점 융성해지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우러러보고 부러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이 해놓은 이 일이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 하물며, 세상에 뛰어난 공의 명성으로써 많은 선비 중에 장원하고, 구름길[雲路 벼슬하여 출세하는 길]에 마음껏 날 수 있는 빛나는 소문이 날로 퍼지는데, 영진(榮進)할 뜻을 끊고 봉양하기에 편하도록 고을 원을 자청했다. 그 큰 재주를 굽혀서 한 고을을 다스림에 있어 청렴으로 처신하고, 위엄으로써 관리를 거느리며, 자애로써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모든 장부와 문서와, 작고 큰 사무를 꼭 한결같이 처리하고, 나머지 일도 모두 정리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남은 힘으로 영선(營繕)할 적에도 사방의 백성들이 도끼질하고 담쌓는 수고를 안 적이 없다. 들인 힘은 간단한데 거둔 공은 빨랐으니, 훗날 조정에 서서 일을 처리해 나갈 적에도 이러한 방법을 쓸 것이다. 공의 뒤를 이어 원으로 오는 이도 아마 공의 뜻을 따라 공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일을 더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것 또한 우리 백성의 복이요, 우리 고을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신증』 【누정】 서하루(棲霞樓) 객관 동쪽에 있다. 군수 김세균(金世鈞)이 세우고, 강혼(姜渾)이 이름을 지었다. 경렴당(景濂堂) 김종직이 옛날에 살던 집으로, 군의 서쪽 백천리(百川里)에 있다. 당 앞에 못을 파고 연을 심고 이름을 경렴이라 하였다.
【학교】 향교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역원】 김천역(金泉驛) 군의 남쪽 10리에 있다. ○ 본도에 소속된 역 20을 찰방(察訪)한다. 추풍(秋豐)ㆍ답계(踏溪)ㆍ안언(安彦)ㆍ무계(茂溪)ㆍ안림(安林)ㆍ금양(金陽)ㆍ부상(扶桑)ㆍ동안(東安)ㆍ팔진(八鎭)ㆍ무촌(茂村)ㆍ고평(高平)ㆍ양원(楊原)ㆍ권빈(勸賓)ㆍ성기(星奇)ㆍ양천(揚川)ㆍ금천(琴川)ㆍ문산(文山)ㆍ작내(作乃)ㆍ장곡(長谷)ㆍ성초(省草) ○ 찰방 1사람이다. ○ 이첨(李詹)의 시에, “낡은 집이 산기슭에 의지하였고, 위태로운 다리는 옅은 모래를 건넜다. 땅이 기름지어 가을에 풍년들었고, 나무는 늙어서 해마다 꽃도 안 피네. 사신 탄 말이 역 아전을 놀라게 하고, 시골 풍속은 들노래에서 들려주네. 유연(悠然)히 회포가 움직이는 것, 좋은 계절을 나그네로 지냄일세.” 하였다. 문산역(文山驛) 군의 북쪽 2리에 있다. 추풍역(秋豐驛) 군의 서쪽 35리에 있다. 남원(南院)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김천원 김천역 동쪽에 있다. 과곡원(果谷院) 군의 남쪽 35리에 있다. 좌현원(左峴院) 좌현 남쪽, 군에서 북쪽으로 38리 되는 곳에 있다. 당지원(堂旨院) 군의 서쪽 21리에 있다. 이정원(梨亭院)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두하원(豆下院) 군의 북쪽 28리에 있다.
【불우】 직지사(直旨寺) 황악산(黃嶽山) 동쪽에 있으며, 고려 임민비(林民庇)가 지은 대장당(大藏堂) 기문이 있다. 진흥사(眞興寺) 병점(餠岾)에 있다. 능여암(能如菴) 직지사 서쪽에 있고, 신라 말엽의 고승 능여가 거처하던 곳이다. 복룡사(伏龍寺)ㆍ난암(卵菴) 모두 흑운산(黑雲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오파산(五波山)에 있다. 여단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어모(禦侮)폐현 본래 신라의 금물현(今勿縣)이었고, 음달(陰達)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감문군(甘文郡)에 소속시켰다. 고려 현종 때에는 상주에, 본조 태조 때에는 본군에 소속되었으며, 지금은 직촌(直村)이 되었다. 굴곡부곡(屈谷部曲)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신가량부곡(新加良部曲) 군의 남쪽 23리에 있다. 조마부곡(助馬部曲) 군의 남쪽 25리에 있다. 어미곡부곡(於未曲部曲) 군의 동쪽 27리에 있다. 영명향(迎命鄕) 군의 동쪽 30리에 있으며, 개녕현 남촌(南村)으로 넘어 들어간다. 황금소(黃金所)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수다곡소(水多谷所) 군의 남쪽 28리에 있다. 파매처(巴買處) 군의 서쪽 7리에 있다. 속칭 봉계리(鳳溪里)라고 한다.
【명환】 본조 김증(金曾) 경태(景泰) 말엽에 군을 맡아 다스렸는데, 정치가 인자하고 자상하였으며 공명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관직에 있을 때 죽으니 아전과 백성들이 슬퍼하기를 부모를 잃은 것과 같이 하였다. 권득경(權得經) 세조 때에 예조좌랑으로서 어머니를 위해 청원하여 군수가 되었다.
『신증』 이인형(李仁亨)ㆍ권빈(權璸)ㆍ문근(文瑾) 정사가 청렴하고 송사가 간명하였다.
『신증』 【인물】 본조 조위(曺偉) 젊어서 과거하였고, 시와 문장을 잘하였다. 벼슬이 호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연산 때에 순천(順川)에 귀양가서 죽었다. 호는 매계(梅溪)이며 시집이 있다.
【우거】 본조 이호성(李好誠) 세종 기해년에 무과에 급제, 무용과 청렴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여러 차례 서북 변경을 지켰고, 옛날 명장의 풍도가 있었으며, 벼슬이 경상우도 절도사(慶尙右道節度使)에 이르렀다. 금극화(琴克和) 그의 선조는 봉화(奉化) 사람인데, 이 군에 이사해 살면서 벼슬이 옥과(玉果) 현감에 이르렀다. 형 극해(克諧)가 죽고 그의 아들 유(柔)가 아직 어렸으므로, 극화가 3년 동안 복상하면서 유를 자기 이들과 같이 길렀고, 유도 그를 아버지처럼 섬기었다. 나이 97세에 죽었다. 이호인(李好仁) 하빈(河濱) 사람으로 대대로 본군의 장암촌(壯巖村)에 살았다. 벼슬이 임피(臨陂) 현감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고 집안이 엄숙하였으며, 제사는 한결같이 가례에 따랐고, 시(緦 석달 복 입는 것)와 공(功 대공은 9월 소공은 5월 복 입는 것)의 친척이 죽어도 모두 제대로 복을 입었다. 유익명(兪益明) 세종 때에 무예로 이름이 났으며, 동북 변경을 지키기 전후 20여 년이었다. 최선복(崔善復) 과거 급제하고 집현전에 들어가 여러 차례 승진하여 벼슬이 경주 부윤에 이르렀다. 최선문(崔善門) 벼슬이 검교 의정부찬성(檢校議政府贊成)에 이르렀다. 이약동(李約東) 과거하여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일에 임하여 청렴ㆍ근엄하였다.
【제영】 첨외벽봉조(簷外碧峯稠) 현맹인(玄孟仁)의 시에, “수양버들은 실실이 늘어지고, 갓핀 연꽃은 점점이 떠 있는데, 난간에 의지하여 다시 고개를 돌리니, 처마 밖에는 푸른 봉우리가 빽빽하구나.” 하였다. 야활갱인조(野闊更人稠) 박융(朴融)의 시에, “대숲에 서늘한 바람이 일고, 솔밭에 푸른빛이 떠도니, 객사의 난간은 의지하여 놀기 알맞은데, 들은 넓고 사람은 빽빽하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는 신라 동잠(桐岑)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금산(金山)이라 고쳐 개령군(開寧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방면】 군내(郡內) 끝이 10리다. 미곡(米谷) 서쪽으로 처음이 8리, 끝이 10리다. 금천(金泉) 남쪽으로 처음이 8리, 끝이 10리다. 고가대(古加大)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다. 건천(乾川)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며, 갑자기 성주(星州)ㆍ지례(知禮) 두 읍 사이에 들어갔다. 조마(助馬)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다. 과곡내(果谷內)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15리다. 과곡외(果谷外)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다. 파탄(巴氽)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다. 본래는 파매처(巴買處)인데, 지금 봉계(鳳溪)라고 한다. 땅은 기름지고 백성은 모두 잘 살았다. 황금소(黃金所)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다. 구소요(仇所要)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다. 천상(川上)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다. 천하(川下)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다. 위량(位良) 동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다. 대항(代項)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5리다. 연명(延命) 본래 연명향(延命鄕)이다.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고, 성주(星州) 북쪽 경계와 개령(開寧) 남쪽 경계에 들어가 있다. ○ 굴곡(屈曲) 부곡은 남쪽으로 3리다. 신가량(新加良) 부곡은 남쪽으로 23리, 조마(助馬) 부곡은 남쪽으로 25리고, 지금 조마면이다. 미곡(米谷) 부곡은 남쪽으로 27리, 수다곡소(水多曲所)는 남쪽으로 28리다.
【토산】 대[竹]ㆍ감ㆍ석이버섯[石蕈].
【성지】 고성산고성(高城山古城) 남쪽으로 9리며, 남은 터가 있다.
【누정】 풍월루(風月樓) 읍내(邑內). 봉황대(鳳凰臺) 대(臺)의 서쪽에 용금문(湧金門)이 있다.
【창고】 읍창 김천역창(金泉驛倉)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오 (역) ┃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