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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역사 제41권 Image of Original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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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빙지(交聘志) 9
일본(日本)과 통교(通交)한 시말(始末)

살펴보건대, 우리나라가 일본과 통교한 것은 임나(任那)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에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가 차례로 통교하였고, 발해(渤海)와 고려(高麗)에 이르러서는 대대로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대개 일본의 지형이 우리나라 육진(六鎭)의 바다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제주(濟州)의 경계에 이르는 탓에 서쪽으로 통하고 북쪽으로 교제함에 있어서 가장 편하고 빠르기 때문이다.
한(漢)나라 이래로 왜(倭)와 한(韓)이 대방(帶方)에 속하였으며, 왜와 한이 같은 등급이었다. 왜왕 무급진(武及珍)이 일찍이 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라진한모한제군사(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羅秦韓慕韓諸軍事)라고 칭하였는데, 신라나 백제 등 여러 나라의 군사들이 언제 일찍이 왜왕의 절제(節制)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이는 대개 스스로 과시하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인호(隣好)를 끊지 않았으며, 교빙(交聘)을 빠뜨리지 않았다. 서적을 전한 것은 진손왕(辰孫王)에게서 시작되었고, 유교가 일어난 것은 왕인(王仁)에게서 시작되었는바, 기용(器用)이나 공기(工伎)에 이르기까지 모두 백제로부터 전수받았다. 성무천황(聖武天皇)은 이를 가리지 못하고 고씨(高氏)와 더불어서 형제(兄弟)의 관계를 맺었다. 그러면서도 유독 발해국을 세운 대씨(大氏)가 조카[甥]로 칭한 것은 비난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국서(國書)에서도 역시 서로 대등한 인국(隣國)의 예를 고집하였다. 이런 것은 사신(使臣)들의 장고(掌故)로써 몰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일본의 여러 서책들을 상고해 보고서 우리나라에 관계되는 일들을 모아 별도로 한 편(編)을 만들었다. 본조(本朝)와 일본의 교빙에 대해서는 이미 《비어고(備禦考)》에서 다 말하였으므로 다시 덧붙이지는 않는다.
-한(漢)나라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이다.- 숭신천황(崇神天皇) 65년(기원전 33, 혁거세25) 가을 7월에 임나국(任那國)에서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 소나카시치)를 파견하여 조공(朝貢)하게 하였다. 임나국은 축자국(筑紫國)에서 2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북으로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 이해에 임라국(任羅國) 사람이 왔는데, 이것이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조공을 바친 시초이다. 임라의 본 이름은 가라(加羅)이다. 그 사람은 이마에 튀어나온 것이 있었는데, 말하기를, “나는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쓰누가아라시토)이다.” 하였다. 월전(越前)의 사반포(笥飯浦)에 도착하였는데, 3년간 머물러 살았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의부가라국 왕의 아들 도노아아라사등이 신석(神石)을 얻었는데, 이 돌이 아름다운 동녀(童女)로 화하였다. 그 뒤에 동녀가 동방(東方)으로 갔다. 도노아아라사등이 그를 찾아 쫓아가 바다를 건너 일본국으로 들어와 숭신천황을 섬겼다. 그가 찾던 동녀는 비매어증사(比賣語曾社)의 신(神)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을 호칭하면서 ‘가라(伽羅)’라고 하는 것은, 대개 외국 사람으로 처음 건너온 자가 도노아아라사등인데 그가 바로 의부가라국 왕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의부가라국은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대가락국(大駕洛國)으로 되어 있으며, 시조(始祖)의 이름은 김수로(金首露)이다. 그 뒤에 신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금관군(金官郡)이라고 불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한나라 성제(成帝) 하평(河平) 원년이다.- 수인(垂仁) 2년(기원전 28, 혁거세30)에 임나 사람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대개 숭신천황 때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소나갈질지에게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이어 적견(赤絹) 100필을 주어 임나의 왕에게 하사하였다. 《일본서기》
○ 임나국의 사람 도노아아라사등이 귀국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니, 허락하였다. 또 말하기를, “너희 본국의 이름을 바꾸되, 어간성천황(御間城天皇 미마키)의 이름을 따라서 너희 나라의 이름으로 삼으라.” 하고는, 이어 붉은 비단을 내려 주었다. 도노아아라사등이 귀국하여 자기 나라 이름을 고쳐 미마나국(彌摩那國)이라고 하였다. 이에 신라 사람들이 듣고는 군사를 일으켜서 그 붉은 비단을 빼앗아 갔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한을 가지게 된 시초이다. 《화한삼재도회》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신라가 우리나라에 죄를 얻은 것이 이즈음부터 시작되었는데, 끝내는 신공황후(神功皇后) 때에 이르러 정벌당하게 되니, 이는 대개 임나를 위하여 정벌한 것이다.” 하였다.
-하평 2년이다.- 수인 3년(기원전 27, 혁거세31)에 신라의 왕자 천일창(天日槍 아메노히보꼬)이 처음으로 와서 조공하였는데, 우태옥(羽太玉) 1개, 족고옥(足高玉) 1개, 제록옥(鵜鹿玉) 1개, 적석(赤石) 1개, 출석소도(出石小刀) 1자루, 출석이모(出石利桙) 1자루, 일진경(日眞鏡) 1개, 웅신리(熊神籬) 1벌 등 모두 일곱 가지였다. 이를 단마국(但馬國)에 보관해 두고 항상 신물(神物)로 여겼다. 천일창은 근강국(近江國)의 오명읍(吾名邑)에서 잠시 동안 거주하다가 그 뒤에 단마국에 도착하여 정착해 살았다. 천일창이 올 때 도인(陶人)으로 따라온 행기보살(行基菩薩)이란 자는 백제 고지씨(高志氏)의 아들인데, 사람들에게 술잔과 도가니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근강국의 경곡(鏡谷)에 사는 도인들은 이 때문에 천일창을 따라온 사람들이다. 《상동》 ○ 또 이르기를, “천일창은 단마국의 출도(出島) 사람 태이(太耳)의 딸 마다오(麻多烏)에게 장가들어서 단마제조(但馬諸助)를 낳았다. 단마제조는 단마일삼저(但馬日三杵)를 낳았고, 단마일삼저는 청언(淸彦)을 낳았고, 청언은 전도간수(田道間守)를 낳았다. 전도간수는 수인천황 90년(61, 탈해왕5) 봄에 칙서를 받들고 신라에 도착해서 귤나무를 가지고 돌아온 자이다.” 하였다. ○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천일창은 죽어서 단마국의 출석대사(出石大社)의 신이 되어 영원토록 제사를 받아먹었으니, 참으로 비범한 사람이다.” 하였다.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의 소잔오존(素盞烏尊)이 그의 아들인 50명의 맹신(猛神)을 거느리고 신라국에 내려와서 증시무리(曾尸茂梨)라는 곳에 살다가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살고 싶지 않은 곳이다.’ 하였다. 고구려의 악곡에 소지마리(蘇志磨利) -증시무리와 훈(訓)이 비슷하다.- 가 있는바, 혹은 회정악(回庭樂)이라고도 하는데 -살펴보건대 《화한삼재도회》에, ‘납소리(納蘇利)는 고구려의 악곡이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인 듯하다.-, 이는 대개 소잔오존이 지은 악곡이다. 그 유음(遺音)이 《인지요록(仁智要錄)》에 실려 있다. 삼한(三韓)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한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4년이다.- 수인(垂仁) 90년(61, 탈해왕5) 봄에 전도간수(田道間守)에게 명하여 상세국(常世國)에 가서 비시향과(非時香果)를 구해 오게 하였다. 99년(70, 탈해왕14) 봄에 비시향과 8간(竿) 8만(縵)을 얻어 돌아왔다. 이때는 천황이 이미 붕어(崩御)하였으므로 전도간수는 황릉(黃陵)을 향하여 통곡하고서 죽었다. 이에 그의 충성에 감동되어 향과를 전도간(田道間)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화한삼재도회》
양안상순(良安尙順)이 말하기를, “상세국은 신라국이고, 전도간수는 신라국의 왕자인 천일창의 현손(玄孫)이므로 파견한 것이다.”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비시향과는 바로 귤(橘)이다. 상세국은 《일본풍토기(日本風土紀)》에 의거하면 절역(絶域)이나 중국(中國)을 지칭하여 모두 상세국이라 한다. 여기에서 상세국이라 이른 것은 신라를 지칭하여 말한 것이다.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이다.- 중애천황(仲哀天皇) 8년(199, 내해왕4)에 웅습(熊襲)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신탁(神託)을 하니, 말하기를, “탁금신라국(柝衾新羅國)이 있는데, 만약 나에게 제사를 올리면 너희가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반드시 그들이 스스로 복종할 것이며, 웅습 역시 복종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중애천황은 이를 믿지 않고 축자도(筑紫道)에 도착하여 웅습을 정벌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선황(先皇)이 신의 가르침을 믿지 않아서 일찍 죽은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신심(信心)을 내어서 신에게 기도하고 장차 삼한(三韓)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이때 신공황후는 임신한 몸으로 출산할 달에 처해 있었다. 이에 아름다운 돌을 구해 허리춤에 차고서 기도하기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이 땅에서 출산하게 해 주소서.” 하였다. 10월 3일에 무내숙녜(武內宿禰) 및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악포(鰐浦)에서 배를 출발시켜 신라에 도착하였다. 그때 조수의 물결이 멀리 신라국의 안까지 올라왔다. 신라는 국초 이래로 바닷물이 나라 안까지 들어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시끄럽게 떠들어 댔는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깃발들이 햇살 아래 빛나고 북 치는 소리가 나라를 진동시켰다. 신라의 신하 가운데 복이지(復以之)란 자가 배를 타고 와 항거하자, 이에 건도종명(建稻種命)이 배를 타고 가 신라의 배를 부수고 수백 명을 죽였다. 그런 다음 큰 언덕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그러자 신공황후가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해를 향해 겨누자 해가 다시 솟아 올라 홀연히 하늘이 어두워지지 않았다. 《상동》
○ 신라의 왕이 신위(神威)를 두려워하여 즉시 흰 깃발을 들고서 스스로 항복하였다. 흰 끈으로 얼굴을 묶고서 지도(地圖)와 호적(戶籍)을 받들어 바치고 배 앞에서 강화를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길이 천지와 더불어 삼가 사부(飼部)가 되겠습니다. 항상 배를 타고 가 봄가을로 말의 빗[馬梳]과 말의 채찍[馬鞭]을 바치겠으며, 다시는 바닷길이 멀다고 하지 않고 매년 남자와 여자를 공물로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거듭 맹서하기를, “동쪽에서 뜨는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또 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가 거꾸로 흐르고 냇물의 돌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지 않는 한, 봄가을로 조공을 빠뜨리거나 말의 빗과 말의 채찍을 바치지 아니하면 하늘의 신령과 땅의 귀신이 함께 우리들을 토벌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라의 왕을 죽이라고 권하니, 신공황후가 삼군(三軍)에 호령을 내리기를, “스스로 복종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이미 재물과 나라를 얻었고, 또한 백성들이 스스로 항복하였으니,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이어 신라 왕의 결박을 풀어 주고 사부(飼部)로 삼았다. 마침내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서 중한 보배를 보관해 둔 창고를 봉(封)하고 지도와 호적 문서를 거두고는 즉시 가지고 있던 지팡이와 창을 신라의 궁궐 문에 세워서 뒷날의 신표(信標)로 삼았다. 그 지팡이와 창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칭일본전》
이에 신라의 왕 파사매금(波沙寐錦) -삼가 살펴보건대 매금(寐錦)은 바로 이사금(尼師今)이다. 그러므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비문(碑文)에도 왕을 칭하여 매금이라고 하였다.- 이 즉시 미질이지파진간기(微叱已知波珍干歧) -살펴보건대 《이칭일본전》에는 미질이지(微叱已知)가 미질허습(微叱許習)으로 되어 있다.- 를 인질로 삼아 금(金), 은(銀), 채색(彩色) 및 능(綾), 라(羅), 겸견(縑絹)을 싸서 80척의 배에다가 실어 왕의 배를 따라가게 하였다. 이 때문에 신라 왕은 항상 80척의 배에 실은 여러 가지 진귀한 보배를 조공으로 바쳤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의 왕이 신라가 일본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역시 와서 강화(講和)하였다. 삼한(三韓)이 모두 복종하자 얼마 있다가 군사를 돌렸다. 12월 14일에 예전존(譽田尊)을 축석(筑石)에서 낳았다. 대시전(大矢田) 및 무내숙녜를 신라에 머물게 하여 삼한진수장군(三韓鎭守將軍)으로 삼았다. 《화한삼재도회》
-위주 방(魏主芳) 정시(正始) 7년이다.- 신공황후(神功皇后) 47년(247, 고이왕14)에 백제국에서 처음으로 매[鷹]를 조공하였다. 《상동》
-위주 방 정시 9년이다.- 신공황후 49년(249, 첨해왕3)에 신라가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자 -백제는 사신을 빠지지 않고 보냈다.- 황전별(荒田別 아라타와케) 및 녹아별(鹿我別 카가와케)을 장군으로 삼고 백제 사람인 구저(久氐) 등을 향도(鄕導)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여 탁순(卓淳)에 이르렀다. 백제의 왕은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 -살펴보건대 두 사람이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로운 군사 수천 명을 더 보태어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의 왕이 화친을 청하였으나 장군이 들어주지 않고 드디어 신라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인하여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啄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등 7국 사람들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돌려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서는 남만(南蠻)의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 내려 주었다. 그러자 백제의 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 -살펴보건대 구수(仇首)의 잘못이다.- 등이 고해진으로 장군을 찾아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네 고을이 스스로 항복해 왔다. 다음 해 봄에 장군이 일본으로 돌아와서 조회하면서 백제의 구저 등으로 하여금 와서 조빙하게 하고, 다사성(多沙城)을 더 내려 주어서 오갈 때의 길을 역(驛)으로 삼게 하였다. 또 한국(韓國)의 궁창(宮倉)을 정하여 임나(任那)의 왕을 궁창수(宮倉首)로 삼은 다음,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과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네 개의 큰 고을을 임나에 붙여서 궁장(宮藏)으로 삼게 하였다. 《일본서기》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시(太始) 7년이다.- 응신천황(應神天皇) 2년(271, 고이왕38)에 황전별(荒田別)에게 명하여 백제에 사신으로 가서 유식한 자를 찾아서 초빙해 오게 하였다. 그러자 백제의 왕이 종족 가운데에서 택하여 그의 손자인 진손왕(辰孫王)을 파견하여 사신을 따라가서 조회하게 하니, 응신천황이 기뻐하여 특별히 총애하면서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비로소 서적(書籍)이 전해졌고 유풍(儒風)과 문교(文敎)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아들은 태아랑왕(太阿郞王)이고, 태아랑왕의 아들이 해양군(亥陽君)이고, 해양군의 아들이 오정군(午定君)이다. 오정군은 3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미사(味沙)이고, 가운데는 진이(辰爾)이고, 막내는 마려(麻呂)이다. 이로부터 나누어져서 세 성(姓)으로 되었는데, 각자 맡은 직임에 따라 씨(氏)를 명하였으며, 진이는 선장(船長)이 되었다. 《상동》
-진나라 태시 10년이다.- 응신천황 5년(274, 미추왕13) 3월 기유에 신라의 왕이 우례사벌(汙禮斯伐),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 80척의 배에다 금(金), 은(銀), 진주, 견(絹)을 싣고 와서 조공하게 하고, 이어 앞서 보낸 인질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데리고 가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미질허지벌한을 꾀어서 거짓으로 속여 말하게 하기를, “사자인 우례사벌, 모마리질지 등이 신에게 고하기를, ‘우리 왕이 당신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으므로 처자식을 적몰(籍沒)하여 모두 관노(官奴)로 삼았소.’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잠시 동안 본국에 돌아가서 허실을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황태후(皇太后)가 그 요청을 들어주고, 인하여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딸려서 보냈다.
이에 둘이 함께 대마도에 와서 조해(鉏海)의 항구에 머물렀다. 그때 신라의 사자 모마리질지 등이 몰래 배와 선원을 구하여 미질한기(微叱旱歧)를 태워 신라로 도망치게 하였다. 그러고는 풀로 인형을 만들어서 미질허지벌한의 침상에 놓아두고 거짓으로 병에 걸린 듯이 꾸민 다음 갈성습진언에게 고하기를, “미질허지벌한이 갑자기 병에 걸려 다 죽어간다.”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이 사람을 보내 병자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곧바로 속은 것을 알고는 신라의 사자 3인을 붙잡아서 나무로 만든 우리 속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이어 신라로 가서 도비진(蹈鞴津)에 주둔하여 초라성(草羅城)을 함락시키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상동》
-진나라 무제 함녕(咸寧) 3년이다.- 응신천황 8년(277, 고이왕44) 봄 3월에 백제인이 와서 조회하였다. 이때 백제의 아화왕(阿花王) -살펴보건대 아신왕(阿莘王)의 잘못이다.- 이 왕자 직지(直支) -살펴보건대 전지(腆支)의 잘못이다.- 를 파견하여 선왕 때의 우호를 닦았다. 《상동》
-진나라 무제 태강(太康) 4년이다.- 응신천황 14년(283, 고이왕50)에 궁월군(弓月君)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의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신이 저희 나라 120현(縣)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귀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람들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을 보내어 궁월군의 백성들을 가라로부터 불러오게 했는데, 3년이 지나도 갈성습진언이 돌아오지 않았다. 《상동》
-진나라 무제 태강 5년이다.- 응신천황 15년(284, 고이왕51) 가을 8월 정묘에 백제의 왕이 아직기(阿直歧)를 파견하여 《역경(易經)》, 《효경(孝經)》, 《논어(論語)》, 《산해경(山海經)》 및 양마(良馬) 2필을 바쳤다. 아직기는 경서(經書)에 능통했으므로 태자인 토도아랑자(菟道雅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경전을 배움에 응신천황이 아직기에게 묻기를, “너희 나라에는 너보다 더 뛰어난 박사(博士)가 있는가?” 하니, 아직기가 대답하기를, “왕인(王仁)이라는 사람이 저보다 더 뛰어납니다. 그는 수재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모야군(上毛野君)의 선조인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백제에 파견하여 왕인을 불러오게 하였다. 다음 해 봄에 왕인이 《천자문(千字文)》을 가지고 왔다. 토도아랑자가 왕인에게서 여러 전적(典籍)을 익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난파황자(難波皇子) 역시 그러하였다. 이에 유교가 비로소 일본에서 행해졌다. 《상동》 ○ 《화한삼재도회》에,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삼한(三韓)에 유교가 시작된 것은 인덕천황(仁德天皇) 때에 해당되는바, 여기서 말하는 때와는 차이가 있다.” 하였다. ○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 “응신천황 15년 갑진에 비로소 백제를 통하여 중국의 문자가 들어왔다.” 하였다.
-진나라 태강(太康) 6년이다.- 응신천황 16년(285, 고이왕52) 봄 2월에 백제의 아화왕(阿花王) -살펴보건대 아신왕(阿莘王)의 잘못이다.- 이 훙(薨)하였다. 응신천황이 직지(直支) -살펴보건대 전지(腆支)의 잘못이다.- 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계승하라.” 하였다. 그리고 이어 동한(東韓)의 땅을 하사하여 보냈다. ○ 《이칭일본전》에,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직지가 일본에 있은 기간이 모두 9년이었으며, 동한은 감라성(甘羅城), 고난성(高難城), 이림성(爾林城)이다.’ 하였다.”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직지가 귀국한 것은 마땅히 이중천황(履中天皇) 이전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동국통감》에는 이것이 진(晉)나라 의희(義煕) 원년(405)의 일로 되어 있다. 의희 원년은 바로 일본의 이중천황 6년이다.
○ 8월에 평군목토숙녜(平群木菟宿禰), 적호전숙녜(的戶田宿禰)를 가라(加羅)에 파견하면서 이어 정병(精兵)을 주고 조칙을 내리기를,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반드시 신라 사람들이 막아서 체류하고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급히 가서 신라를 쳐 길을 열라.” 하였다. 이에 목토숙녜(木菟宿禰) 등이 정병을 보내 신라의 경계에 바짝 다가가자 신라의 왕이 경악하였다. 이어 궁월(弓月)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갈성습진언과 더불어 함께 돌아왔다. 《이상 모두 상동》
-진나라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다.- 응신천황 22년(291, 유례왕8)에 신라의 군사가 일본을 공격하여 명석포(明石浦) 안으로 깊이 들어왔는데, 대판(大坂)과의 거리가 100리였다. 일본 사람들이 강화를 요청하여 백마(白馬)를 잡아 적관(赤關)의 동쪽에서 맹서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백마총(白馬塚)이 남아 있다. 《상동》
-진나라 원강 4년이다.- 응신천황 25년(294, 책계왕9)에 백제의 직지왕(直支王) -살펴보건대 전지왕(腆支王)의 잘못이다.- 이 훙하고, 태자 구이신(久爾辛)이 왕이 되었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대왜(大倭)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는데, 왕모(王母)와 간통하여 무례한 짓을 많이 행하였다. 천황이 이를 듣고는 불러들였다. 《상동》
-진나라 혜제 영강(永康) 7년이다.- 응신천황 37년(306, 미천왕7) 봄 2월에 아지사주(阿知使主)와 도가사주(都加使主)를 오(吳)나라에 보내어 바느질 잘하는 여자를 구해 오게 하였다. 두 사자는 고구려(高句麗)로 건너가서 오나라로 가려고 하였으나, 길을 잘 몰랐으므로 길을 아는 자를 고구려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의 왕이 구례파(久禮波), 구례지(久禮志) 두 사람을 붙여 주어 인도해 가게 하였다. 이 때문에 오나라로 갈 수가 있었다. 오왕(吳王)이 공녀(工女)를 보내 주었는데, 형원(兄媛), 제원(弟媛), 오직(吳織), 혈직(穴織) 네 사람이 그들이다. 《상동》
-진나라 명제(明帝) 태령(太寧) 2년이다.- 인덕천황(仁德天皇) 12년(324, 비류왕21) 가을에 고구려에서 철로 만든 방패와 과녁을 조공하니, 고구려의 사신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이때 신료들을 모이게 해 고구려에서 바친 철 방패와 철 과녁을 쏘게 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 과녁을 관통하지 못하고 오직 순인숙녜(盾人宿禰)만이 철로 된 과녁을 관통하였다. 《상동》
-진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10년이다.- 인덕천황 42년(354, 근초고왕9)이다. 신공황후(神功皇后) 때부터 백제에서 매[鷹]를 바쳐 오기 시작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의납둔창(依納屯倉)의 아미고(阿弭古)가 이상한 새를 바쳤다. 이를 백제국 사람 쇄군(灑君)에게 주어 기르게 하니, 가죽 끈을 새의 다리에 매고, 작은 방울을 새의 꼬리에 매달고는 팔뚝 위에 앉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는 길을 잘 들였다. 인덕천황이 백설조야(百舌鳥野)에 행행하여 사냥하였는데, 꿩을 많이 잡았다. 이것이 일본에서 매를 써서 사냥한 시초이다. 《화한삼재도회》
-송(宋)나라 문제(文帝) 원가(元嘉) 30년이다.- 윤공천황(允恭天皇) 42년(453, 눌지왕37)에 신라가 조선(調船) 80척과 각종 악인(樂人) 80명과 악기(樂器)를 바쳤다. 《일본서기》
-남제(南齊) 무제(武帝) 영명(永明) 11년이다.- 인현천황(仁賢天皇) 6년(493, 문자왕2)에 고구려국에서 공장(工匠) 수류지(須流枳)와 노류지(奴流枳) 2인을 바쳤다. 지금 대화국(大和國) 액전읍(額田邑)의 조숙피고려(造熟皮高麗)는 그들의 후손이다. 《화한삼재도회》
-일본 계체(繼體) 원년(507, 무령왕7)은 바로 양(梁)나라 무제(武帝) 천감(天監) 6년이다.- 계체천황(繼體天皇) 때 백제의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段楊爾)가 왔다. 그 뒤에 고안무(高安茂)가 오자 단양이는 돌아갔다. 《일본서기》
-양나라 무제 대동(大同) 3년이다.- 선화천황(宣化天皇) 2년(537, 법흥왕24)에 신라가 임나(任那)와 더불어 싸웠으므로 협수언(狹手彦)을 파견하여 진압하였다. 《상동》
-양나라 대동 11년이다.- 흠명천황(欽明天皇) 6년(545, 성왕23)에 선신파제편(膳臣巴提便)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백제의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가 입을 벌려 물려고 하자 파제편(巴提便)이 갑자기 왼손을 뻗어서 호랑이의 혀를 잡고 오른손으로 찔러 죽인 다음 가죽을 벗겨 가지고 돌아왔다. 《상동》
-양나라 간문제(簡文帝) 대보(大寶) 원년이다.- 흠명천황 11년(550, 성왕28)에 백제국에서 약(藥)의 색과 맛을 아는 자가 왔는데, 이름은 왕유능타(王有陵陀)라 하였다. 《상동》
-양나라 원제(元帝) 승성(承聖) 원년이다.- 흠명천황 13년(552, 성왕30) 겨울 10월에 백제의 성명왕(聖明王) -살펴보건대 성왕(聖王)의 잘못이다.- 이 서부(西部)의 희씨(姬氏) 달졸(達卒) -살펴보건대 달솔(達率)의 잘못이다.- 사치계(斯致契) 등을 보내어 금동석가상(金銅釋迦像) 1개, 미륵석불(彌勒石佛) 및 번개(幡蓋), 불경(佛經) 몇 권을 바치게 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은 모두 불교를 믿지 않아 그것을 이용하지 않았고, 소아도목숙녜(蘇我稻目宿禰)만이 떠받들어 공경하였다. 이에 그에게 하사하여 석천가(石川家)에 불전(佛殿)을 지어 그것을 안치하고는 비구니 3명과 승려 1명을 두어 공양하게 하니, 소아마자(蘇我馬子), 사마달(司馬達) 등이 모두 불도(佛道)를 숭배하였다. 이것이 불원도량(佛院道場)의 시초이다. 《상동》 ○ 《송사》 일본전(日本傳)에, “흠명천황 임신년에 비로소 백제에서 불법(佛法)이 전해졌는데, 이는 양(梁)나라 승성(承聖) 원년에 해당된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승성 원년은 백제 성왕 30년이다.
○ 백제가 오경박사(五經博士), 의박사(醫博士), 역박사(曆博士)를 보냈다. 《화한삼재도회》
-진(陳)나라 문제(文帝) 천가(天嘉) 3년이다.- 흠명천황 23년(562, 진흥왕23)에 신라가 임나(任那)를 멸망시켰다. 《일본기(日本紀)》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옛날 상세(上世) 때 우리의 소잔오존(素盞烏尊)이 그의 아들인 50명의 맹신(猛神)을 데리고 사라국(斯羅國)에 들어갔으나 그곳에 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요(堯) 임금 시대에는 단군(檀君)이,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에는 기자(箕子)가 나라를 다스리면서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 대란이 일어나 7, 8십 개의 나라로 나누어졌으니, 이른바 삼한(三韓)이라 하는 것은 그 가운데 강한 자였다. 그들은 영토를 겸병하면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삼켜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이때를 당하여 임나가 와서 조공하자, 우리나라에서는 후하게 물품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는데, 신라가 길을 막고서 그것을 빼앗아 스스로 화를 자초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몇 대의 선왕(先王)들을 거치도록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다. 신공황후(神功皇后)께서는 거룩하고 총명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뭇 서인들을 애써 돌보아 주셨고, 하늘의 신과 땅의 귀신을 떠받들었으며, 한 차례 군복을 입고 신라의 죄를 추궁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역시 신라의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 장차 주륙당하려던 것을 온전히 구해 주었으며 먼저 요해지(要害地)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이를 보고 감동하여 번국(藩國)이라고 칭하면서 조공을 끊지 않았으며, 여러 한(韓)들 역시 모두 신하로서 복종하였다. 이에 한(韓)의 지역에 일본부(日本府)를 둔 다음 재신(宰臣)을 임명하여 다스렸다. -그 뒤에 신라에게 멸망되었다.- 그 뒤에 신라가 약속을 어기고 자주 임나를 침공하였다. 흠명천황 23년에 이르러서 신라가 마침내 임나를 멸망시켰는데, 신공황후 이후로부터 593년이 지난 뒤였는바, 임나가 존속한 것은 이처럼 오랜 기간이었다. 이것이 어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공황후의 크게 신령스러운 공렬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 역시 고려에 항복하여 삼한에 삼국이 서로 버티는 형세가 없어졌다. 고려는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옛날의 일을 잊지 않고서 조빙(朝聘)을 끊지 않았다.” 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진나라 선제(宣帝) 대건(大建) 4년이다.- 민달천황(敏達天皇) 원년(572, 평원왕14)에 고구려에서 표문을 올렸는데, 그 문자가 새깃[烏羽]에 쓰여 있는 탓에 깃털의 검은 부분에서는 읽을 수가 없었다. 이에 왕진이(王辰爾)가 깃털을 밥 위에 올려놓고 김을 쐰 다음 비단으로 눌러찍어 글자를 베껴 써서 읽었다. 그러자 민달천황이 그의 재주를 상 주고 왕진이로 하여금 전(殿) 안에서 근시(近侍)하게 하였다. 《화한삼재도회》
-진나라 대건 9년이다.- 민달천황 6년(577, 위덕왕24)에 비로소 백제국으로부터 불상을 만드는 공인(工人)과 절을 짓는 공인이 왔다. 《상동》 ○ 또 이르기를, “처음에 백제에서 불상을 보내오자, 성덕태자(聖德太子)와 마자대신(馬子大臣)이 함께 불법을 신봉했는데, 수옥대련(守屋大連)이 불법을 무너뜨렸다. 그러자 천자(天子)가 그를 주살하고서, 천왕사(天王寺)를 지었다. 그러고는 곳곳에 가람(伽藍)을 세우면서 목공(木工)과 와공(瓦工)을 백제국에서 불러왔으니, 지금 섭주(攝州) 대판(大板)의 와공은 그 통서(統緖)를 전해 받은 자들이다.” 하였다.
-진나라 후주(後主) 지덕(至德) 원년이다.- 민달천황 12년(583, 위덕왕30)에 백제의 일라(日羅)가 와서 조알(朝謁)하였다. 이보다 앞서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키자 민달천황이 임나를 부흥시키려고 하였는데, 일라가 어질면서도 용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일라와 더불어 서로 계획을 꾸미기 위하여 기압승(紀押勝)을 백제에 보내어 일라를 불러오게 하였다. 백제의 왕이 그를 아껴서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자, 다시 길비우도(吉備羽島)를 백제로 파견하였다. 이에 일라가 은솔(恩率), 덕이(德爾) 등과 함께 와서 조알하였다. 민달천황이 대반강수(大伴糠手)로 하여금 신라를 칠 계책을 묻게 하니, 일라가 상책(上策)으로 대답하였는데, 은솔 -살펴보건대 은솔은 백제의 관명(官名)으로, 대개 그 이름을 빠뜨린 것이다.- 이 질투하여 몰래 덕이로 하여금 일라를 살해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덕이를 포박하여 하옥시켰는데, 은솔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었다.
혹은 그 당시에 일라가 제갈량(諸葛亮)의 병법(兵法) 및 64진(陣)을 성덕태자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라가 살아 있을 적에는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섬기면서 대즉방(大卽房)으로 삼았으며, 그가 죽자 제사를 지내면서 떠받들어 애암산권현수신(愛巖山權現守神)으로 삼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일본서기》
-진나라 지덕(至德) 2년이다.- 민달천황 13년(584, 평원왕26)에 소아마자대신(蘇我馬子大臣)을 사방에 사신으로 보내기에 앞서 수행할 자를 찾게 하였다. 이에 파마국(播磨國)에서 환속(還俗)한 고구려의 승려를 찾아내었는데, 이름을 혜편(惠便)이라고 하였다. 소아마자대신이 그를 스승으로 삼고는 사마달(司馬達)의 딸 도(島)를 출가(出家)시킨 다음 선신니(善信尼)라 하였는데, 나이가 11세였다. 그리고 또 선장(禪藏)과 혜선(惠善) 두 비구니를 선신니의 제자로 삼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비구니의 시초이다. 《상동》
-진나라 지덕 6년이다.- 숭준천황(崇峻天皇) 원년(588, 위덕왕35)에 백제국의 사공(寺工) 태량말(太良末), 태문가(太文賈), 고자(古子) 세 사람이 왔다.
○ 백제국으로부터 화공(畫工) 백여(白如)가 왔다.
○ 소아마자대신이 백제의 승려들을 초청하여 수계(受戒)하는 법을 물었는데, 이것이 일본 승려의 시초이다. 《화한삼재도회》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3년이다.- 추고천황(推古天皇) 원년(593, 위덕왕40)에 백제국의 불공(佛工) 다수나(多須那)가 왔다. 그의 아들 안작오(鞍作烏)가 살던 곳을 세상에서는 오불사(烏佛師)라고 칭한다. 《상동》
-수나라 개황 18년이다.- 추고천황 6년(598, 진평왕20)에 신라국에서 공작(孔雀) 1마리를 바치고, 또 까치 2마리를 바쳤다. 이에 난파사(難波社)에서 기르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았다. 《일본서기》
-수나라 문제 인수(仁壽) 2년이다.- 추고천황 10년(602, 무왕3)에 백제국의 승려 관륵(觀勒)이 와서 천문서(天文書), 지리서(地理書), 역서(曆書), 둔갑서(遁甲書), 방술서(方術書)를 바치니, 왕진(王陳)으로 하여금 역법(曆法)을 익히고, 대반촌주고총(大伴村主高聰)으로 하여금 천문과 둔갑술을 익히고, 산배신일병(山背臣日幷)으로 하여금 방술법을 익히게 하였는데, 모두 다 익혀서 업을 이루었다. 《화한삼재도회》
-수나라 양제(煬帝) 대업(大業) 6년이다.- 추고천황 18년(610, 영양왕21)에 고구려에서 담징(曇徵)이 왔다. 담징은 오경(五經)에 통달하고, 아울러 단청(丹靑)을 잘 칠하였으며, 또 종이와 먹, 맷돌을 만들 줄 알았다. 이것이 일본에서 종이와 맷돌을 만든 시초이다. 《상동》
-수나라 대업 8년이다.- 추고천황 20년(612, 무왕13)에 백제국에서 미마지(味摩之), 이중방(已中芳), 가다의(加多意) 세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오(吳)나라에서 배워 기악무(伎樂舞)를 출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로 하여금 동부(童部)에서 음악을 가르치게 하고는 앵정촌(櫻井村)에서 살게 하였다. 그다음 소년들을 모아서 그 춤을 배우게 하니, 진야신제자(眞野臣弟子)와 신한재문(新漢齋文) 두 사람이 그 음악을 배워서 전하였다. ○ 또 이르기를, “백제의 미마지(味摩之) 등이 전해 온 음악을 노래하였다.” 하였다.
○ 이해에 백제국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나병(癩病)을 심하게 앓아서 모습이 몹시 추하였으나 산악(山嶽)의 모양을 잘 만들었으며, 또 긴 다리를 만드는 데 능숙하였다. 이에 여러 나라에 보내어서 삼하입경장교(三河入脛長橋), 수내곡교(水內曲橋), 목습제교(木襲梯橋), 원강빈명교(遠江濱名橋), 회진암천교(會津闇川橋), 두암원교(兜巖猿橋) 등 180개의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이로부터 오가는 도로가 비로소 통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당나라 고조(高祖) 무덕(武德) 원년이다.- 추고천황 26년(618, 영류왕1) 가을 8월 계유 초하루에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인하여 말하기를, “수나라 양제(煬帝)가 30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서 우리를 공격하였다가 도리어 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포로인 정공(貞公)과 보통(普通) 2인 및 고취(鼓吹), 쇠뇌[弩], 포석(抛石) 따위 등 열 가지 물품과 토산물(土産物) 및 낙타(駱駝) 1필을 바칩니다.” 하였다. 《일본서기》
-당나라 무덕 7년이다.- 추고천황 32년(624, 영류왕7)에 고구려의 승려 혜관(慧灌)이 와서 조회하니, 그를 원흥사(元興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해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었는데, 그에게 명하여 비를 빌게 하였다. 혜관이 푸른 옷을 입고 삼론(三論)을 강설하니 큰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추고천황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발탁하여 승정(僧正)으로 삼았다. 그 뒤에 하내국(河內國)에서 정상사(井上寺)를 개창하였으며, 삼론종(三論宗)을 널리 폈다. 《화한삼재도회》
○ 추고천황 때 고구려의 사문(沙門) 혜자(慧慈)가 와서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태자가 일본에 큰 공을 세우자 백공(百工)이 모두들 혜자를 조사(祖師)로 여겼다. 《상동》
-당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5년이다. 서명천황(舒明天皇) 3년(631, 무왕32) 3월 경신 초하루에 백제의 왕 의자(義慈)가 왕자인 풍장(豐章) -살펴보건대 풍장(豐璋)의 잘못이다.- 을 볼모로 들여보냈다. 《일본서기》
-일본 황극천황(皇極天皇) 원년은 바로 당나라 정관 16년이다.- 천풍재중일족희(天豐財重日足姬) -살펴보건대 바로 황극천황(皇極天皇)이다.- 4년(645, 선덕여왕14) 5월에 사문(沙門)인 지통(智通)과 지달(智達)이 명을 받들고 신라의 배를 타고 대당국(大唐國)에 가서 현장 법사(玄奘法師)에게 무성중생의(無性衆生義)를 배웠다. 《상동》
-당나라 고종(高宗) 영휘(永徽) 2년이다.- 효덕천황(孝德天皇) 백치(白雉) 2년(651, 진덕여왕5)에 신라의 조공사(調貢使)인 사찬(沙湌) 지만(知萬) 등이 왔는데, 당나라의 의복을 입고 축자도(筑紫道)에 도착하였다. 효덕천황은 그들이 풍속을 사치스럽게 만드는 것을 싫어하여 추방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 거세대신(巨勢大臣)이 상주하기를, “지금 신라를 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천황이 듣지 않았다. 그 당시에 신라가 당나라에 뜻을 통보하고는 장차 일본과 화친 관계를 끊으려고 하였다. 《상동》
-당나라 고종 현경(顯慶) 5년이다.- 제명천황(齊明天皇) 6년(660, 의자왕20) 9월 계묘에 백제가 달솔(達率) -이름은 빠졌다.- 과 사미(沙彌) 각종(覺從) 등을 파견하여 와서 고하기를, “금년 7월에 신라가 힘을 믿고 세력을 형성하여 이웃 나라와는 친하게 지내지 않고 당나라 사람들을 끌어들여 우리나라를 전복시켰습니다. 이에 임금과 신하들은 포로로 잡혀가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서부(西部)의 은솔(恩率) 귀실복신(鬼室福信)이 혁연히 발분하여 임야기산(任射歧山) -살펴보건대 이는 임존성(任存城)의 잘못인 듯하다.- 에 웅거하였으며, 달솔(達率) 여자진(餘自進)은 중부(中部)의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살펴보건대 이는 구지하성(久知下城)의 잘못이다.- 에 웅거하여 각각 한 곳씩을 경영하면서 흩어진 군졸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그런데 앞서의 싸움에서 무기가 다 없어졌으므로 막대기를 잡고 싸워 신라의 군사를 패퇴시키고 그들의 무기를 빼앗았습니다. 얼마 있다가는 백제의 군사들이 정예로워져서 당나라 사람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복신 등이 드디어 같은 나라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왕성(王城)을 보호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존경하여 ‘좌평복신(佐平福信)’, ‘좌평자진(佐平自進)’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복신만은 신묘한 계책을 세워서 이미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켰습니다.” 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백제의 좌평 귀실복신이 좌평 귀지(鬼智) 등을 파견하여 당나라의 포로 100여 인을 바치고, 또 군사를 파견하여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며, 아울러 왕자 여풍장(余豐璋)을 되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당 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적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나라의 강역을 분탕질하고, 우리나라의 사직(社稷)을 무너뜨리고, 우리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런데도 백제국은 멀리 천황의 은혜를 입어서 다시 모여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삼가 왕자인 풍장을 맞이해 와서 국왕으로 삼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칙령을 내리기를, “군사를 파견하여 구원해 달라는 요청은 옛날에도 들었고, 위태로움을 돕고 끊어진 나라를 이어 주는 것은 일상적인 전례(典例)에도 드러나 있다. 백제국이 궁박하여 나에게 온 것은 나라가 망하여 의지할 곳이 없고 고할 곳이 없어서이다. 창을 베고 자고 쓸개를 맛보고 있으니 반드시 구원하여 보존해 주어야 할 것이다. 멀리서 와서 표문을 올려 아뢴 만큼 그 뜻을 저버리기가 어려우니, 장군들에게 명해서 여러 길로 함께 진격해야겠다. 여러 장수들은 구름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움직여서 사탁(沙啄)에 함께 모여 사나운 오랑캐들을 쳐 죽여 저들의 위급한 상황을 구원해 주라. 그리고 유사(有司)들에게는 모두 물품을 넉넉하게 주어 예를 갖추어 돌려보내라.” 하였다. 《상동》
-당나라 고종 용삭(龍朔) 원년이다.- 제명천황 7년(661, 풍왕1) 4월에 백제의 복신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백제의 왕자인 규해(糺解)를 맞이해 가기를 요청하였다. 7월에 제명천황이 붕어하여 태자(太子) -바로 천지천황(天智天皇)이다.- 가 청정(聽政)하였다. 8월에 전장군(前將軍)인 대화하(大華下) 아담비라부련(阿曇比邏夫連), 소화하(小華下) 아변백지신(阿邊百枝臣) 등과 후장군(後將軍)인 대화하 아배인전비라부신(阿倍引田比邏夫臣), 대산상(大山上) 물부련웅(物部連熊), 대산상 수군대석(守君大石) 등을 파견하여 백제를 구원하였으며, 이어 무기와 오곡(五穀) -바로 군량(軍糧)이다.- 을 보내 주었다.
9월에 황태자가 장진궁(長津宮)에 나아가 백제의 왕자인 풍장(豐璋)에게 직관(織冠)을 주었으며, 또 다신장부(多臣蔣敷)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어 대산하(大山下) 협정련빈랑(狹井連檳榔), 소전하(小田下) 진조전래진(秦造田來津) -살펴보건대 《화한삼재도회》에는 진박시전래진(秦朴市田來津) 등으로 되어 있다.- 을 파견하여 군사 5000여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호위하여 보내 주게 하였다. 풍장이 백제로 돌아가자 복신이 그를 맞이하러 나와서는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나라와 정사를 모두 풍장에게 맡겼다. 《상동》
○ 5월 정사에 탐라(耽羅)가 처음으로 왕자인 아파기(阿波伎)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을 바쳤다. 이 뒤로는 자주 와서 조회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12월에 고구려를 구원하러 간 일본의 군사와 장수들이 백제의 가파리빈(加巴利濱)에 정박하였다. 고구려국은 날씨가 몹시 추워서 물이 얼어 있었다. 당나라 군사들이 운거(雲車)와 충붕(衝棚) 등의 무기를 앞세우고 쳐들어오면서 북과 징을 시끄럽게 쳐댔다. 고구려의 군사들은 용감하고 건장하였으므로 다시 당나라의 보루 2개를 탈취하였다. 이에 오직 2개의 진만이 남게 되자, 당나라 군사들이 무릎을 껴안고 울었다. 《일본서기》
-당나라 용삭(龍朔) 2년이다.- 천지천황(天智天皇) 원년(662, 풍왕2) 정월 정사에 백제의 좌평 귀실복신에게 화살 10만 척(隻) -살펴보건대 《화한삼재도회》에는 1만 본(本)으로 되어 있는바, 아마도 일본에서는 화살 10개가 1본(本)인 것 같다.-, 실 500근, 솜 1000근, 포(布) 1000단(端), 가죽 1000장, 종자용 벼[稻種] 3000곡(斛)을 하사하였다.
3월 계사에 백제의 왕에게 포 300단을 하사하였다. 5월에 대장군인 대금중(大錦中) 아담비라부련(阿曇比邏夫連) 등이 배 170척을 거느리고 풍장(豐璋) 등을 백제국으로 호송하였다. 칙명을 내려 풍장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으며, 또 복신에게 금책(金策)을 주고, 작록(爵祿)을 내려 포상하였다. 이때에 풍장 등이 복신과 더불어서 칙명을 받았다. 이해에 백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병장기를 수선하고 선박을 준비하였으며, 군량미를 저축하였다.
3월에 당나라 사람들과 신라 사람들이 고구려를 정벌하니, 고구려가 일본에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군사와 장수들을 파견하여 소류성(疏留城) -살펴보건대 주류성(周留城)의 잘못인 듯하다.- 에 웅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당나라 군사들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략하지 못하였으며, 신라는 고구려의 서쪽 보루를 넘지 못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동국통감(東國通鑑)》의 기사는 대부분 우리 일본의 국사(國史)와 합치되나, 일본이 고구려를 구원한 사실은 모르고 있다.” 하였다.
-당나라 용삭 3년이다.- 천지천황 2년(663, 풍왕3) 2월 병술에 백제가 달솔(達率) 김수(金受) 등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이날 좌평(佐平) 복신이 포로로 잡은 당나라 사람 속수언(續守言) 등을 올려 보냈다. 3월에 전장군(前將軍)인 상모야군치자(上毛野君稚子)와 간인련대개(間人連大蓋), 중장군(中將軍)인 거세신전신역어(巨勢神前臣驛語)와 삼륜군근마려(三輪君根麻呂), 후장군(後將軍)인 아배인전신비라부(阿倍引田臣比邏夫)와 대택신겸병(大宅臣鎌柄)을 파견하여 군사 2만 7000인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6월에 전장군 상야모군치자 등이 신라의 사비(沙鼻), 기노강(歧奴江) 두 성(城)을 빼앗았다. 이달에 백제의 왕 풍장(豐璋)이 복신이 반심(反心)을 품고 있는 것을 꺼려서 손바닥을 뚫은 다음 가죽으로 묶었다. 그러나 스스로 결정하기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복신의 죄가 이와 같으니 참수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니,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말하기를, “이처럼 악역(惡逆)을 저지른 자는 풀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자 복신이 즉시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면서 ‘썩은 개, 미친 놈’이라고 욕을 하였다. 왕은 군졸을 시켜서 참수한 다음 머리로 젓을 담갔다.
8월 갑오에 복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신라가 곧바로 백제로 쳐들어가 주유성(州柔城) -살펴보건대 주류성(周留城)의 다른 표기이다.- 을 탈취하려고 꾀하였다. 무술에 적들이 장차 주유성에 이르러서 왕성(王城)을 에워싸려고 하였다. 대당(大唐)의 군사들이 전선(戰船) 170척을 거느리고 백촌강(白村江) -살펴보건대 바로 《당서(唐書)》에 나오는 백강(白江)이다.- 에 진을 쳤다. 무신에 일본의 수군 가운데 가장 먼저 온 자들이 대당의 수군과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하여 퇴각하였고 당나라 군사들은 진을 굳게 하여 지켰다.
기유에 일본의 여러 장수들이 백제의 왕과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측 군사들이 앞 다투어 진격하면 저들은 응당 스스로 퇴각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대오가 흐트러졌던 일본의 중군(中軍) 군사들을 거느리고 진영이 견고한 대당(大唐)의 군사들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자 대당의 군사들은 좌우에서 수군을 내어 포위하고서 공격하였다. 이에 잠깐 사이에 일본의 군사들이 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아주 많았고, 뱃머리를 되돌릴 수가 없어서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은 전사하였으며, 백제의 왕 풍장은 몇 사람을 데리고서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쳤다.
9월 정사에 백제의 주유성이 비로소 당나라 군사들에게 항복하였다. 갑술에 일본의 수군 및 백제의 좌평 여자신(余自信) -살펴보건대 여자신(餘自信)의 잘못이다.-,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晉首), 억례복류(憶禮福留)가 백제국 사람들과 함께 저례성(氐禮城)에 이르렀으며, 그다음 날에 배를 띄워 비로소 일본으로 향하였다. 《상동》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무릇 삼한은 대대로 우리 일본의 부용국(附庸國)이었다. 그런데도 신라는 우리 일본의 은혜를 잊고 걸핏하면 침략하려는 마음을 품었으며, 백제는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니 백제가 망하게 되어 위급함을 고하는데 어찌 위급함을 돌보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제명천황(齊明天皇)과 천지천황(天智天皇)이 축자도(筑紫道)에 행행하여 자주 대군(大軍)을 일으켜서 백제를 보존해 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위태로운 즈음에 복신(福信)이 억울하게 해침을 당하고 말았는바, 복신은 백제의 양장(良將)으로 장차 백제를 부흥시킬 만한 형세였는데, 3월에 나라가 결국 폐허가 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풍장의 잘못이다. 참으로 슬프다.” 하였다. 《이칭일본전》
○ 양안상순(良安尙順)이 말하기를,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정벌한 이래로 해마다 조공을 바쳤는데, 삼한 가운데에서 백제가 가장 잘 바쳤고, 고구려는 혹 빼먹기도 하였다. 신라는 걸핏하면 반역을 하였는데, 이번 전역(戰役)에서는 당나라의 원병(援兵)들이 유리하였으므로 더욱더 대당(大唐)에 빌붙었다. 얼마 있다가 고구려 역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하여 마침내 신라에 의해 삼한이 통일되었다.” 하였다. 《화한삼재도회》
-당나라 고종 건봉(乾封) 원년이다.- 천지천황(天智天皇) 5년(666, 문무왕6)에 탐라(耽羅)가 비로소 일본에 왔다. 탐라는 또한 탐모라(耽牟羅)라고도 하는데, 백제의 남쪽에 있는 섬이다. 7년에 또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당나라 고종 총장(總章) 2년이다.- 천지천황 8년(669, 문무왕9) 3월에 탐라가 세자인 구마기(久麻伎) 등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병신에 탐라의 왕에게 오곡(五穀)의 종자를 하사하였다. 《일본서기》 ○ 《화한삼재도회》에, “탐라는 조선(朝鮮) 때에 이르러서 통일되었는데, 끝내 조선에 병합되었다.” 하였다.
-당나라 무후(武后) 성력(聖曆) 원년이다.- 문무천황(文武天皇) 2년(698, 효소왕7) 봄 정월 갑자에 신라의 사신인 일김찬(一金湌) -살펴보건대 일길찬(一吉湌)의 잘못이다.- 김덕필(金德弼) 등이 와서 공물을 조공하였다. 3월 갑자에 김덕필 등이 신라로 돌아갔다. 《속일본기(續日本記)》
-당나라 무후 구시(久視) 원년이다.- 문무천황 4년(700, 효소왕9) 5월 신유에 직광사좌백(直廣肆佐伯) 숙녜마려(宿禰麻呂)를 신라에 대사(大使)로 파견하고, 근대사좌미조신(勤大肆佐味朝臣) 하좌마려(賀佐麻呂)를 소사(少使)로 파견하였는데, 대위(大位)와 소위(少位)가 각각 1인이고, 대사(大史)와 소사(少史)가 각각 1인이었다. 겨울 10월 계해에 직광사좌백 숙녜마려 등이 신라로부터 돌아와서 공작(孔雀)과 진귀한 물품을 바쳤다. 《상동》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16년이다.- 성무천황(聖武天皇) 신귀(神龜) 5년(728, 무왕10)에 발해국(渤海國)의 사신이 와서 조공하였는데, 이들은 고구려의 부족(部族)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가 신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잔당들이 나라를 세우고는 발해국이라 하였다. 《화한삼재도회》 ○ 살펴보건대 왜의 성무천황 신귀 5년은 바로 발해의 무왕 인안(仁安) 10년이다.
○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에 세워진 나라이다. 천명개별천황(天命開別天皇) 7년(668, 보장왕27)에 고구려의 왕 고씨(高氏)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 뒤에 천지진보풍조부천황(天之眞寶豐祖父天皇) 2년(698)에 대사영(大社榮) -마땅히 대조영(大祚榮)으로 되어야 한다.- 이 비로소 발해국을 건국하였으며, 화동(和銅) 6년(713, 대조영15)에 당나라에서 그 나라를 책립(冊立)하였다. 나라는 남북의 길이가 2000리이고, 주현(州縣)이나 관역(館驛)이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靺鞨)의 부락이며, 백성들은 말갈족이 많고 토착인이 적다. 모두 토착인으로 촌장(村長)을 삼았는데, 큰 마을의 촌장을 도독(都督)이라 하고, 작은 마을의 촌장을 판사(判史)라고 하며, 그 아래 백성들은 모두 수령(首領)이라 한다. 지역이 몹시 추워서 수전(水田) 농사를 짓기에 마땅치가 않으며, 제법 글을 해독할 줄 안다. 《일본일사(日本逸史)》
-당나라 개원 20년이다.- 천평(天平) 4년(732, 무왕14) 9월 경인에 발해군(渤海郡)의 사신인 수령(首領) 고재덕(高齋德) 등 8인이 출우국(出羽國)에 도착하였다.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안부를 묻고, 의복을 하사하였다. 12월 병신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재덕 등에게 의복과 모자, 신발 등을 하사하였다.
발해군은 옛날의 고구려국이다. 담로(淡路) 조정(朝廷) 7년(668, 보장왕27) 겨울 10월에 당나라의 장수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멸망시켰으므로, 그 뒤로는 조공을 바치는 것이 오랫동안 끊어졌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서 발해군의 왕 대무예(大武藝)가 영원장군 낭장(寧遠將軍郞將) 고인의(高仁義), 유장군 과의도위(遊將軍果毅都尉) 고덕주(高德周), 별장(別將) 사나루(舍那婁) 등 24인을 파견하여 서장(書狀)과 아울러 초피(貂皮) 300장 및 토산물을 가지고 와 조빙(朝聘)하게 하여 하이(蝦夷)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고인의 이하 16인은 도중에서 모두 죽고 수령 고재덕 등 8인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도착했다.
5년(733, 무왕15) 정월 갑인에 천황이 중궁(中宮)에 나아가니 고재덕 등이 발해 왕의 국서와 방물을 바쳤다. -국서는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이에 고재덕 등 8인에게 모두 정6위상(正六位上)의 관직을 제수하고 직급에 맞는 색깔의 옷을 하사하였으며, 이어 5위(位) 이상과 고재덕 등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면서 대사(大射) 및 아악(雅樂)을 하사하였다. 그러고는 조신(朝臣) 충마려(蟲麻呂)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고재덕 등과 함께 가게 하면서 발해 왕에게 채백(綵帛) 10필, 능(綾) 10필, 명주[絁] 20필, 실 100꾸러미, 솜 200둔(屯)을 하사하였다. 《속일본기》
-당나라 개원 23년이다.- 천평 7년(735, 성덕왕34) 2월 계묘에 신라의 사신 김상정(金相貞)이 경사로 들어왔다. 계축에 중납언(中納言) 정3위(正三位) 다치비진인현수(多治比眞人縣守)를 파견하여 병부(兵部)의 조사(曹司)에서 신라의 사신이 경사로 들어온 뜻을 묻게 하였는데, 신라의 사신이 전례없이 호칭을 고쳐서 왕성(王城)이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신을 되돌려 보냈다.
9년(737, 효성왕1) 2월 기미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국이 예의를 잃은 사실을 상주하게 하였는데, 사신을 보낸 뜻을 상주하지 않았다. 이에 5위 이상과 6위 이하의 관원 총 45인을 내전(內殿)으로 불러서 의견을 진달하게 하였다. 병인에 여러 관서에서 의견을 상주하였는데, 군사를 일으켜서 정벌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3월 임인에 신라에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파견하기에 앞서 사(使)인 정6위상 대반(大伴) 숙녜삼중(宿禰三中) 등 40인이 들어와 하직 인사를 하였다. 《상동》
-당나라 개원 26년이다.- 천평 10년(738, 문왕2) 3월에 일본의 사신인 조신(朝臣) 광성(廣城) 등이 당나라에 조회하러 갔다가 소주(蘇州)로 돌아서 바다를 건너오던 중 표류하여 곤륜국(崑崙國)에 도착하였는데, 대부분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광성 등 8인만이 겨우 빠져나와서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가 등주(登州)를 경유해서 바다를 건너 5월에 발해의 국경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발해의 왕 대흠무(大欽茂)가 약홀주도독(若忽州都督) 충무대장군(忠武大將軍) 서요덕(胥要德), 운휘장군(雲麾將軍) 이진몽(已珍蒙), 수령(首領) 이알기몽(已閼棄蒙) 등을 파견하여 일본의 국왕에게 조빙하려고 하였다. 이에 광성 등으로 하여금 서요덕을 따라가게 하였으므로 즉시 함께 출발하였다.
바다를 건널 적에 발해의 배 1척이 풍랑을 만나 전복되어 대사(大使)인 서요덕 등 40인이 물에 빠져 죽고, 이진몽 등만이 겨우 살아나 광성 등과 함께 출우국(出羽國)에 도착하였다. 이에 천황이 태극전(太極殿)에 나아가 이진몽이 활을 쏘는 것을 보았으며, 또 중궁(中宮)에 나아가 이진몽으로 하여금 발해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서 들었다. 이어 발해로 돌려보내면서 미농시(美濃絁) 30필, 실 150꾸러미, 조면(調綿) 200둔(屯)을 하사하였다. 《일본일사》
-당나라 현종 천보(天寶) 원년이다.- 천평 14년(742, 경덕왕1) 2월 무인에 태재부(太宰府)에서 신라의 사신 사찬(沙湌) 김흠영(金欽英) 등 187인이 왔다고 하였다. 경진에, 새로 도읍한 서울에 궁실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대변기조신(右大辨記朝臣) 반마려(飯麻呂) 등으로 하여금 태재부에서 김흠영 등을 대접하게 하고 그곳에서 되돌려 보냈다. 《속일본기》
-당나라 천보 9년이다.- 효겸천황(孝謙天皇) 천평승보(天平勝寶) 2년(750, 경덕왕9) 6월 기축에 신라의 왕자 김태렴(金泰廉) 등이 조회하고 아울러 방물을 조공하면서 아뢰기를, “신라국의 왕이 말하기를, ‘일본에 천황(天皇)의 조정이 조림(照臨)하자 신라가 비로소 멀리서 와 조회하는 것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는바, 배를 잇달아 보내어 나라를 받들었습니다. 지금 나라의 임금이 직접 와서 조공을 바치려고 하였으나, 나라에 하루라도 임금이 없으면 국가의 정사가 끊어지거나 어지러워질까 염려되기에, 이에 왕자인 한아찬(韓阿湌) -살펴보건대 한아(韓阿)는 신라의 방언(方言)이다. 일(一)을 일러 하나[韓阿]라고 하니, 바로 일찬(一湌)을 말한다.- 김태렴을 파견하여 왕을 대신해서 우두머리가 되어 아랫사람 370여 인을 거느리고 들어가서 조회하게 하며, 겸하여 각종의 방물을 조공하게 합니다. 삼가 이상과 같이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진에 신라의 사신에게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칙령을 내려서 말하기를, “신라국이 와서 우리 조정을 떠받든 것은 기장족원황태후(氣長足媛皇太后)가 신라를 평정한 때부터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본의 번방(藩邦)이 되었다. 그런데 전왕(前王) 김승경(金承慶)의 대부(大夫) 김사공(金思恭) 등이 언행을 패만스럽게 하면서 상국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기에 사신을 파견하여 문죄하려던 차였다. 지금 신라의 왕 김헌영(金軒英) -살펴보건대 김헌영(金憲英)의 잘못이다.- 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직접 본 조정에 나오려고 하다가 나라의 정사가 염려되어서 왕자 김태렴을 파견해 대신 들어와 조회하게 하였으며, 겸하여 방물을 조공하게 하였다. 이에 내가 그들이 정성을 바치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작위를 올려 주고 물품을 하사하는 바이다. 그리고 또 지금 이후로는 국왕이 직접 올 경우에는 미리 말로 상주(上奏)할 것이며, 나머지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조회할 경우에는 반드시 표문(表文)을 싸 가지고 오게 하라.” 하였다. 《상동》
○ 효겸천황(孝謙天皇) 때 발해의 사신인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모시몽(慕施蒙) 등 75인이 와서 조공하였는데, 국왕의 뜻으로 10여 년 동안 사신을 보내오지 않은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왜황(倭皇)이 답서(答書)에서 고구려의 예전 기록을 인용하면서 발해의 국서가 격례(格例)에 벗어난 것을 힐책하였다. 《일본일사》
-당나라 숙종(肅宗) 지덕(至德) 원년이다.- 천평승보 8년(756, 문왕20)이다. 이보다 앞서 일본의 사신인 조신(朝臣) 전수(田守) 등이 발해로부터 대당(大唐)의 소식을 묻고는 돌아와서 왜황에게 말하기를, “천보 14년(755)인 을미년 11월 9일에 어사대부 겸 범양절도사(御史大夫兼范陽節度使) 안녹산(安祿山)이 군사를 동원해 난리를 일으켜 자칭 대연성무황제(大燕聖武皇帝)라고 칭하고는, 범양(范陽)을 고쳐 영무군(靈武郡)으로 삼고, 사는 집을 잠룡궁(潛龍宮)이라 하고, 연호를 성무(聖武)라 하고, 그의 아들인 안경서(安慶緖)를 머물러 두어 지범양군사(知范陽郡事)로 삼았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정예로운 기병 20여 만 명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곧장 남양(南陽)으로 들어와서는 관서(官署)를 설치하고 백관(百官)을 두었습니다. 이에 천자가 안서 절도사(安西節度使) 가서한(哥舒翰)을 파견하여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 동진관(潼津關)을 지키게 하고, 대장(大將) 봉상청(封常淸)을 파견하여 15만 명을 거느리고 가 별도로 낙양(洛陽)을 포위하게 하였습니다. 천보 15년(756)에 안녹산이 그의 장수인 손효철(孫孝哲) 등을 파견하여 2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 동진관을 공격하게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신풍(新豐)으로 들어갔습니다. 6월 6일에 천자가 검남(劍南)으로 파천(播遷)하였으며, 7월 갑자에 황태자인 여(璵)가 영무도독부(靈武都督府)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지덕(至德)이라고 개원(改元)하였습니다.” 하니, 왜황이 태재부에 명령을 내리기를, “안녹산은 미쳐 날뛰는 오랑캐이며, 교활한 어린애다. 천명을 거역하고 반역을 일으켰으니 일이 반드시 불리해질 것이다. 반역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반드시 해동(海東)을 노략질할 것이다.” 하고는, 대이고비조신(大貳告備朝臣) 진비(眞備)에게 명하여 기이한 모책을 미리 강구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발해가 보국장군(輔國將軍) 양승경(楊承慶), 귀덕장군(歸德將軍) 양태사(楊泰師), 판관(判官) 풍방례(馮方禮) 등을 파견하여 사신으로 보냈는데, 왜황이 양승경에게 정3위를, 양태사에게 종3위를, 풍방례에게 종5위를 제수하고, 녹사(錄事) 이하 19인에게는 녹봉을 하사하였다. 그러고는 기촌전성(忌村田成)으로 하여금 양승경과 함께 발해에 사신으로 가 발해로부터 당나라에 간 대사(大使)인 조신(朝臣) 등원하청(藤原河淸)을 맞이해 오게 하였으며, 견(絹) 30필, 미농시(美濃絁) 30필, 실 200꾸러미, 솜 300둔, 금(錦) 4필, 양면(兩面) 2필, 힐라(纈羅) 4필, 백라(白羅) 10필, 채백(綵帛) 30필, 백면(白綿) 100첩(帖)을 하사하였다. 《상동》
○ 다음 해에 발해가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현도주자사 겸 압위관(玄菟州刺史兼押衛官)인 개국공(開國公) 고남신(高南申), 부사(副使) 고흥복(高興福), 판관(判官) 이능본(李能本), 해비(解臂) 안귀보(安貴寶)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는 중대(中臺)의 첩보(牒報)로써 아뢰기를, “등원하청을 맞이해 오기 위해 보낸 귀국의 사신 총 99인이 본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당의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전후에 걸쳐서 반란을 일으킨 탓에 안팎이 소란스러워 살해를 당할까 염려스러웠습니다. 이에 단지 두목(頭目) 고원도(高元度) 등 11인만을 파견하여 당나라로 가 등원하청을 맞이해 오게 하였으며, 즉시 본국의 사신인 양방경(楊方慶) 등을 차임하여 함께 출발시켰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왜황이 양후사(陽侯史) 영구(玲璆)를 파견하여 고남신(高南申) 등과 함께 발해에 사신으로 가게 하면서 명주[絁] 30필, 미농시(美濃絁) 30필, 실 200꾸러미, 솜 300둔을 보냈다. 《상동》
-당나라 대종(代宗) 광덕(廣德) 원년이다.- 폐제(廢帝) 천평보자(天平寶字) 7년(763, 문왕27)에 발해가 자수대부(紫綬大夫) 행정당좌윤(行政堂左允)인 개국남(開國男) 왕신복(王新福), 부사 이능본(李能本), 판관 양회진(楊褱珍), 품관(品官) 착배달(着排達), 능신(能信) 등을 파견하여 23인을 거느리고 와서 방물을 바쳤다. 왕신복 등이 당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씨(李氏)인 태상소제(太上少帝) 정(井)이 죽고 광평왕(廣平王)이 섭정(攝政)하는데, 농사가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으며, 사조의(史朝義)가 성무황제(聖武皇帝)라 칭하자 사람들이 그에게 많이 붙고 군사들이 몹시 강하여 감히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등주(鄧州)와 양양(襄陽)은 이미 사씨(史氏)에게 소속되었고, 이씨는 소주(蘇州)만을 차지하고 있어서 조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을 참으로 쉽사리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동》
-당나라 광덕 2년이다.- 천평보자 8년(764, 문왕28)에 발해가 대사(大使)인 청수대부(靑綬大夫) 일만록(壹萬祿), 부사 모창배(慕昌拜) 등 325인을 파견하여 배 17척을 타고 와 출우국(出羽國)에 도착하였다. 왜황이 발해의 국서가 격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국서와 신물(信物)을 받지 않자, 일만록이 재배(再拜)한 다음 땅에 엎드려 울면서 말하기를, “임금은 피차간에 마찬가지입니다. 신들은 반드시 죄를 받을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국서를 고쳐 쓰고 발해의 왕을 대신해서 사죄하였다. 이에 일만록에게 종3위를 제수하였다. 발해의 왕에게 보내는 국서에 이르기를, “이번에 온 국서를 살펴보니 국서를 쓰는 도리에 아주 어긋났다. 날짜 아래에 관직과 품계 및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국서의 말미에다가는 천손(天孫)의 참호(僭號)를 함부로 썼다. 고씨(高氏) 때에는 병란(兵亂)이 쉴새가 없어서 조정의 위엄을 빌려 저들이 형제(兄弟)라고 칭하였으나, 지금의 왕은 일찍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조카[甥]라고 칭하니, 예에 어긋난 것이다. 다음해에 오는 사신은 다시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미농시(美濃絁) 30필, 견(絹) 30필, 실 200꾸러미, 조면(調綿) 300둔을 부쳐 보냈다. 모창배가 일본에서 졸하자, 무생조수(武生鳥守)를 파견하여 일만록 등과 함께 발해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그런데 가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능등국(能登國)에 도착하여 발해와 일본의 사신들이 겨우 살아났다.
일본에서 처음에 발해국에 파견하는 사신이 타고 가는 배의 이름을 능등(能登)이라고 하여 선신(船神)에게 무사하게 해 주기를 기원하였는데, 그에 대한 응험이 있었다. 이에 그 배에 종5위의 품계를 제수하고 금관(錦冠)을 하사하였는데, 그 관은 겉은 비단이고 안은 거친 명주로 만들었으며, 자색의 갓끈을 늘어뜨렸다. 《상동》
-당나라 대종 대력(大曆) 3년이다.- 칭덕천황(稱德天皇) 신호경운(神護景雲) 2년(768, 문왕32)에 발해의 사신 오수불(烏須弗)이 능등국(能登國)에 도착하였다. 국사(國司)가 온 까닭을 묻자, 오수불이 글씨를 써서 말하기를, “발해와 일본은 오래도록 우호 관계를 맺어 왔기에 서로 오가면서 조빙(朝聘)하여 형제처럼 지냈다. 근년에 일본의 내웅(內雄) 등이 발해에 머무르면서 학문과 음악을 배웠는데, 일본으로 돌아간 지 지금 10년이 지났는데도 안부를 알려 오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대사(大使) 일만록(壹萬祿) 등을 파견하여 귀방(貴邦)의 길을 통해 가서 조회에 참가하게 하였는데, 4년이 지나도록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시금 우리들을 차임하여 직접 면대해서 명지(明旨)를 받들게 한 것일 뿐 다른 일은 없습니다. 진상하는 물품과 국서는 모두 배 안에 있습니다.” 하였다. 대정관(大政官)이 국서를 담은 함(函)이 격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물리치면서 오수불 등에게 말하기를, “발해의 사신이 이 길로 오는 것은 전부터 금지하였으니, 예전의 규례에 따라 축자도(筑紫道)의 길을 따라서 오시오.” 하였다. 《상동》
-당나라 대력(大曆) 5년이다.- 광인천황(光仁天皇) 보귀(寶龜) 원년(770, 문왕34)에 발해가 헌가대부(獻可大夫) 사빈소령(司賓少令) 개국남(開國男) 사도몽(史都蒙), 대판관(大判官) 고록사(高祿思), 소판관(少判官) 고울림(高鬱琳), 판관 고숙원(高淑源), 대록사(大錄事) 사도선(史道仙), 소록사(少錄事) 고규선(高珪宣) 등 187인을 파견하여 사신으로 보내와서 왕비(王妃)의 상(喪)을 고하고 왜황이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는데, 풍랑을 만나 물에 빠져 죽어 겨우 46인만이 살아남았으며, 고숙원과 소록사 1인 역시 죽었다. 국사(國司)가 묻기를, “오수불(烏須弗)이 돌아갈 적에 대정관(大政官)의 처분이 있었으니, 발해의 사신은 마땅히 예전의 규례대로 태재부(太宰府)로 향해 오고 이 길로 와서는 안 돼오. 그런데 지금 약속을 어기고 왔으니, 어찌된 일이오?” 하니, 사도몽 등이 대답하기를, “그런 분부를 받았으므로 우리들이 우리나라 남부(南府)의 토우포(吐亏浦)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대마도(對馬島)의 죽실진(竹室津)으로 향해 가다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이곳 금지 구역에 도착한 것입니다. 약조를 어긴 죄를 다시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일본에서 또 16인을 해안에 남겨 두려고 하자, 사도몽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은 한 몸을 쪼개서 등을 둘로 나누는 것이며 사지를 끊고서 기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함께 들어가도록 허락하였다.
왜황(倭皇)이 중각문(重閣門)에 나아가 사도몽으로 하여금 말을 타고 활을 쏘게 하고는 관람하였다. 이어 조신(朝臣) 전계(展繼)를 파견하여 사도몽과 함께 발해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으며, 견(絹) 50필, 실 200꾸러미, 솜 300둔을 하사하였다. 사도몽이 더 주기를 요청하자, 또다시 황금 작은 것 100냥, 수은(水銀) 큰 것 100냥, 금칠(金漆) 1단지, 해석류유(海石榴油) 1단지,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 4관, 빈랑(檳榔) 10매를 주었으며, 왕비의 상에 견 20필, 명주[絁] 2필, 솜 200둔을 부의(賻儀)하였다.
○ 이해에 발해가 또 헌가대부(獻可大夫) 사빈소령(司賓少令) 장선수(張仙壽)를 파견하여 국왕의 뜻으로 말하기를, “조신 전계(展繼) 등이 길을 잃어 표류하다가 먼 오랑캐 나라의 국경에 도착하였는데, 배가 부서졌기에 2척의 배를 만들어서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신라의 사신 김초정(金初正) 등이 말하기를, “당나라에 있는 대사(大使) 등원청하(藤原淸河), 학사(學士) 조형(朝衡) 등이 숙위(宿衛)하고 있는 왕자 김은거(金隱居) 편에 편지를 부치면서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속일본기》 ○ 살펴보건대 조형은 원정천황(元正天皇) 영귀(靈龜) 2년(716)에 당나라에 들어갔으니, 바로 개원(開元) 4년으로, 왕유(王維)와 포길(包桔)이 전송하면서 지어 준 시와 서(序)가 있다. 효겸천황(孝謙天皇) 5년(753), 즉 천보(天寶) 12년에 이르러서 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리를 만나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가 신라의 사신을 통하여 편지를 부친 것이다.
-당나라 덕종(德宗) 건중(建中) 원년이다.- 보귀(寶龜) 11년(780, 선덕왕1) 정월 기사에 천황이 태극전(太極殿)에 나아가 조하(朝賀)를 받았다. 당나라의 사신인 판관(判官) 고학림(高鶴林)과 신라의 사신인 음찬(蔭湌) 김난손(金蘭蓀) 등이 각각 의식대로 절을 올려 축하하였다. 신미에 신라의 사신이 방물을 바치고, 이어 아뢰기를, “우리 국왕이 말하기를, ‘신라는 개국한 이래로 은혜로운 덕화를 입었기에 항상 배를 보내어서 방물을 조공한 지 햇수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는 나라 안에 도적들이 일어난 탓에 들어와서 조회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삼가 음찬 김난손, 급찬(級湌) 김엄(金嚴) -살펴보건대 《삼국사기》에는 김암(金巖)으로 되어 있다.- 등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고, 겸하여 정월 초하루를 축하합니다. 그리고 또 당나라에 파견하였던 판관(判官) 해상삼수(海上三狩) 등을 찾아내어 사신을 따라 들어가게 하였으며, 상례(常例)에 따라 어생(語生)인 참의좌변(參議左辨) 정4위하(正四位下) 대반숙녜백마려(大伴宿禰伯麻呂) 등을 공부하게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칙령을 내리기를, “저 신라라는 나라는 대대로 배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떠받들었는바, 그들이 오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김태렴(金泰廉) 등이 환국한 뒤로는 정기적으로 바치는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며, 하는 일마다 무례하였다. 이 때문에 지난해에 신라의 사신을 되돌려 보내고 만나 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고 겸하여 정월 초하루를 축하하였으며, 또 해상삼수를 구원해 사신을 따라오게 하였는바, 이와 같이 정성을 바치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지금 이후로 이와 같이 봉공하면 두텁게 은혜를 내려 상례(常禮)로 대우할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을 귀국하여서 국왕에게 말하라.” 하였다. 이날 당나라와 신라의 사신에게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었으며, 차등 있게 녹봉을 하사하였다. 임신에 신라의 사신인 음찬 김난손에게 정5품상(正五品上)을, 부사인 급찬 김엄에게 정5품하를, 대판관(大判官) 한나마(韓奈麻) 음중업(蔭仲業), 소판관(少判官) 나마(奈麻) 김정락(金貞樂), 대통사(大通事) 한나마 김소충(金蘇忠) 3인에게 각각 종5품하를, 그 이외 사람에게는 6품 이하를 각각 차등 있게 제수하였으며, 각 품계에 해당되는 색깔의 의복과 신발을 하사하였다. 《상동》
○ 환무천황(桓武天皇) -일본 환무천황 연력(延曆) 원년(782, 문왕46), 바로 당나라 건중(建中) 3년이다.- 때 발해의 사신인 압령(押領) 고반필(高伴弼), 통사(通事) 고열창(高說昌)이 왔는데, 국서가 격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받지 않았으며, 또 축자도(筑紫道)를 경유하지 않은 것을 힐책하였다. 철리(鐵利)의 관인(官人)이 고열창 등과 더불어 좌차(坐次)를 다투자, 대정관(大政官)이 반열을 달리하게 하였다. 고반필의 배가 부서졌으므로 9척의 배를 주어 돌아가게 하였다. 《일본일사》
-당나라 덕종 정원(貞元) 12년이다.- 연력 15년(796, 강왕2) 4월 무자에 발해국이 정간대부(庭諫大夫) 공부 낭중(工部郞中) 여정림(呂定琳) 등 66인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상(喪)을 고하였다. -살펴보건대 발해 문왕(文王)의 상이다.- 여정림 등이 표류하여 이지(夷地)의 지리파촌(志理波村)에 도착하였다가 약탈을 당하여 사람들이 대부분 흩어지거나 죽었다. 출우국(出羽國)에서 이런 상황을 말하자, 왜황이 여정림을 월후국(越後國)에 두고 물품을 공급하여 주었다. 여정림이 또 당나라에 가 있는 학문승(學問僧) 영충(永忠) 등이 부쳐 보낸 편지를 전하였는데, 답서(答書)를 부쳤다. 《상동》
-당나라 정원 15년이다.- 연력 18년(799, 강왕5) 봄 정월 병오에 발해국의 사신 위군대장군(衛軍大將軍) 좌웅위도장(左熊衛都將) 상주국(上柱國) 개국자(開國子) 대창태(大昌泰)가 사신으로 왔다. 왜황이 태극전에 나아가 조하를 받았는데, 9품 이상의 문무 관원과 외국 사신이 각각 배종(陪從)하였다. 이때 사배(四拜)를 줄여서 재배(再拜)만 하였고, 박수는 치지 않았는데, 이는 발해의 사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 채전(彩殿)을 지어서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발해의 사신이 탄 배가 대부분 능등국(能登國)에 도착하였으므로 능등국으로 하여금 사신들이 묵을 곳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유취일본국사(類聚日本國史)》
-일본 홍인(弘仁) 원년(810, 정왕2)은 바로 당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5년이다.- 차아천황(嵯峨天皇) 홍인 연간에 발해의 사신 고남용(高南容), 수령(首領) 고다불(高多弗)이 왔다. 조집원(朝集院)에서 잔치를 하사하고, 이어 숙미동인(宿彌東人)을 파견하여 고남용과 함께 발해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숙미동인이 국서(國書)가 격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버려두고서 돌아왔다. 고다불은 합류하지 않고 월전국(越前國)에 남아 있었는데, 월중국(越中國)에 그대로 머물러 두고 음식을 공급해 주면서 그로 하여금 어생(語生)들에게 발해의 말을 가르치게 하였다. 《일본일사》
○ 인명천황(仁明天皇) -일본 인명천황 즉위년(834, 이진5)은 바로 당나라 문종(文宗) 태화(太和) 8년이다.- 때 발해의 대사 왕효렴(王孝廉), 부사 고경수(高景秀), 판관 고막선(高莫善)ㆍ왕승기(王昇基) 등이 왔다. 왕효렴에게 종3위를, 고경수에게 정4위를, 고막선과 왕승기에게 정5위를 제수하고, 또 녹사(錄事) 이하에게는 녹봉을 하사하였다. 고효렴 등이 돌아갈 때 대당(大唐)의 월주(越州) 사람 주광한(周光翰), 언승칙(言升則) 등을 딸려 보냈다. 《상동》
○ 문덕천황(文德天皇) -일본 문덕천황 원년(851, 이진22)은 바로 당나라 선종(宣宗) 대중(大中) 5년이다.- 때 백제국의 하성(河成)이 일본에 와서 벼슬하여 좌근위(左近衛)가 되었는데, 인물(人物)과 화초(花草)를 잘 그렸다. 그 뒤로는 그림을 그리는 자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일본기》 ○ 살펴보건대 이때에는 백제라는 명칭이 없었으니, 혹 신라를 백제라고 잘못 지칭한 것인가?
-당나라 대중(大中) 13년이다.- 청화천황(淸和天皇) 정관(貞觀) 원년(859, 건황2)에 발해국의 마효신(馬孝愼)이 와서 당나라 서앙(徐昻)이 만든 《선명력(宣明曆)》을 바치자, 온 나라에 반포하여 시행하였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당나라 희종(僖宗) 중화(中和) 2년이다- 양성천황(陽成天皇) 원경(元慶) 6년(882, 경왕13) 12월 27일 을미에 가하국(加賀國)에서 역마(驛馬)를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달 14일에 발해국의 입근사(入覲使) 배정(裵頲) 등 105인이 해안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였다. 《상동》
○ 우다천황(宇多天皇) -일본 우다천황 원년(889, 경왕20)은 바로 당나라 소종(昭宗) 용기(龍紀) 원년이다.- 때 발해의 사신 왕문구(王文矩)가 왔다. 왜황이 풍락전(豐樂殿)에 나아가 5위 이상에게 잔치를 베풀었으며, 발해의 사신이 격구(擊毬)하는 것을 관람하고, 솜 200둔을 하사하였다. 《일본일사》
○ 제호천황(醍醐天皇) -일본 제호천황 원년(898, 경왕29)은 바로 당나라 소종 광화(光化) 원년이다.- 때 발해의 사신 고정태(高貞泰), 고장선(高璋璿) 등이 와서 거란(契丹)의 대게(大揭) 2구(口), 개 2마리를 바쳤다. 《상동》
-송(宋)나라 태종(太宗) 옹희(雍煕) 4년이다.- 일조원(一條院) 원년(987, 성종6)에 대송(大宋)의 태주(台州) 사람 주문덕(周文德)과 무주(婺州) 사람 장인소(張仁紹) 두 상인이 왔다. 축자(筑紫)의 태재부(太宰府)에서 아뢰기를, “백제국의 후비(后妃)가 건강한데도 머리털이 백발이 되었는데, 온갖 의술이 효험이 없었습니다. 후비의 꿈에서 이르기를, ‘너는 일본국의 승미사(勝尾寺)에 있는 관음보살에게 기도하라.’ 하므로, 기도를 하자 과연 전과 같이 검은 머리가 났습니다. 이에 가기(枷器), 금고(金鼓), 금종(金鍾) 등을 두 사람 편에 부쳐보냈습니다.” 하였다. 《화한삼재도회》 ○ 또 이르기를, “백제국에서 후비의 새례사(賽禮使)를 그 나라 사람으로 뽑지 않고 멀리 송나라 상인에게 부쳐보낸 데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이때에는 백제라는 명칭이 없었으니, 혹 고려를 지칭한 것인가?
-송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3년이다.- 백하원(白河院) 승력(承曆) 4년(1080, 문종34)에 고려의 국왕이 병들었다. 일본의 의원 단파아충(丹波雅忠)의 의술이 아주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상인 왕칙정(王則貞)에게 편지를 부쳐보내 의원을 구하였는데, 그때 보낸 편지 가운데 ‘성지(聖旨)를 받들어서 귀국을 방문하겠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에 그 내용이 예의를 잃었다는 이유로 방물(方物)을 도로 돌려보내고 단파아충을 파견하지 않았다. 돌려보내는 편지에 ‘쌍어는 봉지의 달에 도달하기 어려운데, 편작이 어찌 계림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겠는가[雙魚難達鳳池之月 扁鵲何入鷄林之雲]’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고려와 송나라 조정에서조차 그 글을 훌륭하게 여겼다. 《상동》
-송나라 도종(度宗) 함순(咸淳) 4년이다.- 귀산제(龜山帝) 문영(文永) 5년(1268, 원종9)에 고려의 사신 반부(潘阜)가 일본에 국서를 전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신하의 예로써 몽고대국(蒙古大國)을 섬겨 정삭(正朔)을 받든 지가 몇 해가 되었소. 황제께서는 어질고 밝아서 천하를 한집안으로 여겨 먼 나라 보기를 가까운 나라처럼 보고 있는바, 일월이 비치는 곳에서는 모두들 황제의 덕을 우러르고 있소. 지금 귀국과 통호(通好)하고자 하여 과인에게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일본은 고려와 이웃 나라로 제도와 정사가 아름다우며, 한(漢)ㆍ당(唐) 이래로 여러 차례 중국과 통호하였다. 그러므로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국서를 가지고 가게 하되, 풍랑이 험하다는 핑계로 사양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 분부가 엄하였소. 이에 부득이하여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를 파견하여 황제의 국서를 받들고 가게 하였소. 귀국이 중국과 통호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은 때가 없었소. 더구나 지금 황제께서 귀국과 통호하려는 것은 귀국이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을 이롭게 여겨서가 아니라, 대개 온 천하가 복종하였다는 이름을 천하에 드높이려는 것일 뿐이오. 만약 귀국이 통호를 한다면 반드시 후한 폐백으로 보답할 것이니, 사신 한 사람을 보내어 가 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귀국에서는 잘 참작해서 하기 바라오.” 하였는데, 국서의 내용이 몹시 무례하였으므로 답장을 하지 않았다. 《상동》
○ 2월 7일에 고려가 보내온 첩장(牒狀) -살펴보건대 바로 반부가 가지고 온 도서(圖書)이다.- 이 이르렀으므로 상반정대상국(常磐井大相國) 등실씨(藤實氏)가 태상천황(太上天皇)에게 올렸다. 25일에 몽고에서 서신이 왔을 때의 일에 의거하여 22사(社)를 임시로 세우고서 봉폐사(奉幣使)가 기도를 하니 상서롭지 못하였다. 3월 27일에 장의(仗議)가 있었다. 《제왕편년집성(帝王編年集成)》
-송나라 함순 5년이다.- 문영(文永) 6년(1269, 원종10) 3월 7일에 9국(國)에서 대파라(大波羅)에게 보고하기를, “몽고국의 사인(使人) 2인, 고려의 사인 4인, 겸인(傔人) 70여 인이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흑적(黑的), 은홍(殷弘) 및 신사전(申思佺) 등이다.
-송나라 함순 10년이다.- 문영 11년(1274, 원종15)이다. 처음에 고려의 사신이 두세 번 왔는데 모두 추방하여 돌려보냈다. 그러자 몽고가 크게 분노하여 급히 병선(兵船) 900척으로 일본을 정벌하였다. 몽고군의 대장은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 우부원수(右副元帥) 홍다구(洪茶邱), 좌부원수(左副元帥) 유복정(劉復亭)이고, 고려의 삼익군(三翼軍)은, 중군(中軍) 김방경(金方慶), 지병마사(知兵馬事) 박지량(朴之亮)ㆍ김흔(金忻), 부사(副使) 임개(任愷), 좌군사(左軍使) 김신(金侁), 지병마사 위득유(韋得儒), 부사 손세정(孫世貞), 우군사(右軍使) 김문비(金文庇), 지병마사 나유(羅裕)ㆍ박보(朴保), 부사 반부(潘阜)였는데, 몽고의 군사는 2만 5000명이고, 고려의 군사는 8000명이며, 초공(梢工)과 수수(水手)는 6700명이었다. 배가 합포(合浦) -살펴보건대 지금의 창원부(昌原府)이다.- 에서 출발하여 11일이 지나 일기도(壹歧島)에 이르러서 서로 싸웠는데, 유복정이 화살에 맞아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마침 밤중에 태풍을 만나 전함이 암초에 부딪쳐서 대부분 부서졌다. 김신이 물에 빠져 죽고 잔당들은 도망쳤는데, 돌아가지 못한 자가 무려 1만 3500여 명이나 되었다. 《화한삼재도회》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12년이다.- 후우다(後宇多) 건치(建治) 원년(1275, 충렬왕1) 정월 18일에 몽고 사람 2인, 고려 사람 1인, 명주(明州) 사람 1인 등 4인이 진서(鎭西)로부터 관동(關東)으로 파견되었는데, 낙중(洛中)으로 들이지 않았다. 《제왕편년집성(帝王編年集成)》
○ 이해에 몽고의 사신 두세충(杜世忠) 및 고려의 사신이 겸창(鎌倉)에 왔는데, 두세충을 죽여서 효수(梟首)하였다. 《화한삼재도회》
-원나라 지원 18년이다.- 홍안(弘安) 4년(1281, 충렬왕7) 6월에 고려의 배 500척이 일기도와 대마도에 이르러 사람을 죽였으므로 섬사람들이 산으로 숨었는데, 적들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내어서 죽였다. 고려의 배는 종상충(宗像沖)에 정박하고 몽고의 배는 일기도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 거기(筥崎)의 앞 잔도(殘島)와 지가도(志加島) -《동국통감》에 나오는 세계촌(世界村) 대명포(大明浦)가 바로 이곳이다. 세계(世界)와 지가(志加)는 음이 비슷하다.- 에 도착하였다. 고려의 배가 종상충으로부터 몽고의 배에 가까이 왔다.
섬사람들이 박다(博多)에 이 사실을 고하자, 이때 관동(關東)의 추전성차랑(秋田城次郞) 등의 대군 및 9국(國)과 2도(島)의 군사들이 모두 수성(水城) -천지왜황(天智倭皇)이 축자(筑紫)에 큰 둑을 축조하고 물을 가두어 놓았는데, 이름을 수성이라 하였다.- 에 모였다. 6일부터 13일까지 수전(水戰)은 계속되었고, 적들은 해안에 상륙하지 못한 채 응도(鷹島)에 웅거하였다. 윤7월 초하루에 태풍이 불고 번개가 치면서 청룡(靑龍)이 물에서 나오고, 유황(硫黃)의 기운이 바다에 가득 끼었는데, 적선 3500척이 순식간에 파도에 휩쓸리거나 난파당하여 바위에 걸리거나 표류하였으며, 물에 빠져 죽은 군사들의 시체가 물결을 따라 포구 안으로 밀려 들어와 포구가 이 때문에 막히어 시신들을 밟고 건널 수가 있었다.
패한 군졸들은 응도에 있으면서 부서진 배를 수리하여 돌아가고자 하였다. 삼랑좌아문위(三郞左衙門尉) 경자(景資)가 적들이 지친 틈을 타 공격하자, 적들이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하여 서로 찔러 죽이거나 혹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항복하였는데, 이들을 모두 죽였다. 9일에 9국의 역마(驛馬)가 승첩을 고하자 금진(今津)의 고려사(高麗寺)에 깊은 웅덩이를 파서 몽고와 고려 군사들의 시신을 파묻게 하였다. 《이칭일본전》 ○ 《화한삼재도회》에, “4년에 몽고의 아라한(阿刺罕)과 범문호(范文虎)가 만군(蠻軍) 10만 명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에서 출발하고, 홍다구(洪茶邱)와 흔도(忻都)가 -원문 빠짐- 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合浦)를 출발하여, 고려의 김방경(金方慶),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과 더불어 24일 동안 항해하여 일본에 이르렀다. 몽고의 군사는 일기도에 이르러 선군(船軍)이 풍랑을 만나 103인의 뱃사공들이 36일 동안이나 갈 곳을 잃고 헤매었다. 얼마 뒤에 힘껏 싸웠으나, 왜병들이 돌진하자 몽고군이 대패하였으며, 홍다구는 말을 타고 도망쳐 죽음을 면하였다. 다음날 다시 싸웠으나 패하였으며, 군중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죽은 자가 모두 3000여 인이나 되었다. 흔도와 홍다구 등은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였고, 또 아라한은 도중에 병이 나 오지 못하였으며, 범문호 역시 기일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못하였다. 얼마 있다가 범문호가 전함 3500척과 만군(蠻軍) 10만 명을 거느리고 8월 초하루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침 태풍을 만나 모두 익사하여 시체가 조수를 따라 포구 안으로 밀려 들어온 탓에 포구가 메워져 시신을 밟고 건널 정도였으며, 홍다구와 범문호 등은 도망하여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살아 있던 포로 3만 인은 팔각도(八角島)에서 모두 참수하였으며, 오직 방간창(放干閶), 만청(萬靑), 오만오(吳萬五) 3인만이 환국하여 싸움의 형세를 전하였다. 세상에서 몽고와 고려가 연합하여 싸웠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원나라 세조(世祖)가 3대가 남긴 공렬을 떨쳐서 중국을 병탄하고 사해(四海)를 아우른 다음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신령스러운 우리나라를 탈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하였으며, 한갓 이루지 못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10만 인의 군사를 물에 빠져 죽게 하였고, 이 때문에 도적들이 잇달아 일어나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어서 끝내 일본을 치려는 계획을 중지하고 말았다. 이에 천하 후세 사람들이 우리 조정이 천험(天險)과 신위(神威)가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저들이 우리나라를 치면서 고려의 길을 취하여 나왔는데, 전함이 3000척, 군사가 40만 명, 쌀이 100만 석이었으며, 고려의 병선이 900척, 군사가 1만 명, 초공(梢工)과 수수(水手)가 1만 5000명, 군량미가 12만 3560여 석이었다. 이처럼 큰 대군을 일으켜서 이처럼 큰일을 거행하였으니, 그 깊은 계책과 원대한 생각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군사를 합쳐서 해안에 상륙하지 못한 채 가련하게도 신풍(神風)이 한 번 불자 파멸하고 말았다. 행군하고 용병하는 즈음에 사신으로 나왔다가 도달하지 못한 자는 흑적(黑的)과 은홍(殷弘) 등이고, 도달한 자는 조양필(趙良弼)이고, 죽임을 당한 자는 두세충(杜世忠)이고, 도착하지 못하고 되돌아간 자는 낭가대(囊加歹)이고, 우리나라를 토벌하기를 청한 자는 흔도와 홍다구이고, 상소를 올려서 토벌을 중지하기를 청한 자는 최욱(崔彧), 앙길아(昻吉兒), 조양필(趙良弼), 유선(劉宣), 장강(張康)이고, 전사한 자는 월리마사(月里麻思), 왕순(王綧)이고, 살아서 돌아간 자는 아탑해(阿塔海), 합라대(哈刺䚟), 범문호, 이정진(李庭珍), 초정(楚鼎)이고, 돌아가서 상을 받은 자는 속대아(速䚟兒)였다. 말 70필을 버리고 4000명의 군사를 버리지 않은 자는 장희(張禧)이고, 자신의 목숨을 아껴 10만 명의 군사를 버린 자는 범문호였다. 후대의 중국 사람들은 모두 원나라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각자 의논이 있었다.” 하였다. 《상동》
○ 왜구(倭寇)가 일어났다. 원나라 지정(至正) 10년(1350, 충정왕2) -족리존(足利尊) 관응(觀應) 원년- 에 도망친 무리들이 해도(海島) 사이에 숨어 있다가 난리가 일어난 틈을 타 국가의 금법(禁法)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국과 조선의 바닷가 지역으로 가 관청을 분탕질하면서 재물을 약탈하였는데, 이해부터 점점 더 창궐하였다. 지정 23년(1363, 공민왕12) -족리의전(足利義詮) 정치(貞治) 2년- 8월 13일에 원나라 순제(順帝)가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격문(檄文)을 보내 금지시키게 하였는데, 족리의전이 왜구를 제압하지 못하였다. 《상동》
-명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 10년이다.- 후원융(後圓融) 영화(永和) 3년(1377, 우왕3)에 고려의 사신 정몽주(鄭夢周)가 와서 조빙하였다. 축전주(筑前州)의 대우인(大友人)이 사신들을 침학하기를 즐겼으므로 정몽주 역시 잡혀서 구금되었는데, 끝내는 감화를 받아 예우하여 보냈다. 곽린(郭麟)은 구금되어 절의를 지키며 맞서다가 죽었는데, 그의 묘에 난 풀은 모두 서쪽을 향하고 있다. 고려에서 온 사신으로는 나흥유(羅興儒), 안길상(安吉常), 이자용(李子庸) 등이 있다. 《화한삼재도회》
양안상순(良安尙順)이 말하기를, “왕씨(王氏)는 제호천황(醍醐天皇) 연희(延喜) 18년(918, 태조1)에 왕이 되어서 태조라고 칭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후고려(後高麗)라고 하였다. 삼한을 통일한 뒤로는 모두 조공을 끊었다. 그 뒤에 몽고를 따라 나와서 일본을 멸망시키려고 하다가 패하자, 더욱더 원수 관계가 되었다. 또 몽고가 이미 멸망하고 대명(大明)이 통일한 뒤에 대명이 일본과 화친 관계를 맺자 조선 역시 화친을 맺었다.” 하였다. 《상동》


[주D-001]숭신천황(崇神天皇) 65년 : 《일본서기》에 나오는 연대는 응신기(應神紀) 이전에 나오는 연대를 백제측의 사료(史料)와 맞추어 볼 때 2주갑(周甲), 즉 120년을 올려 기년(紀年)을 세웠는바, 대개 120년을 내려서 보면 맞는다. 본서에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연대를 그대로 표기하였다.
[주D-002]임나국(任那國) : 고대 변진(弁辰) 지방에 자리 잡고 있던 나라 이름으로, 금관가야(金官加耶)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는 가야연맹체를 총괄하여 지칭하기도 한다. 임나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의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으로, 여기서는 ‘任那加羅’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임나가라는 금관가야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일본서기》에서는 여러 가야를 총칭해 임나라고 하였다. 후대의 학자 가운데에는 임나가 ‘축자(筑紫), 즉 오늘날의 복강현(福岡縣) 지방으로부터 2000여 리가 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험한 물이 가로막고 있고, 계림, 즉 오늘날의 경주(慶州)의 서남방에 있다.’고 한 구절을 근거로 그 위치를 대마도(對馬島)로 비정(比定)하는 학자도 있다.《文定昌, 韓國古代史, 柏文堂, 1970》
[주D-003]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 : 의부(意富) 즉 오호는 일어(日語)로 ‘대(大)’의 뜻으로, 대가라(大加羅), 즉 금관가야(金官伽倻)를 가리킨다.《古代韓日文化交流硏究,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208쪽》
[주D-004]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 원문에는 ‘都怒我阿斯羅’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쓰누가아라시토’로 읽는데, ‘쓰누가(都怒我)’는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란 뜻이다.《상동》
[주D-005]사반포(笥飯浦) : 어떤 곳에는 ‘통반포(通飯浦)’로 되어 있다. 지금의 복정현(福井縣) 돈하시(敦賀市) 즉 쓰루가이다.
[주D-006]미마나국(彌摩那國) : 임나국(任那國) 즉 미마나으로, 나라의 명칭이 어간성천황(御間城天皇)의 이름을 따라서 정해졌다고 하는 내용인데, 이는 허구이다. 오히려 임나라는 국호에서 어간성이란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古代韓日文化交流硏究 209쪽》
[주D-007]천일창(天日槍) : 《고사기(古事記)》에는 ‘천일지모(天日之矛)’로 표기되어 있다.
[주D-008]근강국의 …… 사람들이다 :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도기(陶器) 기술이 일본에 들어간 것이다.《완역일본서기 109쪽 주》
[주D-009]전도간수(田道間守) : 《고사기》에는 ‘다지마모려(多遲摩母呂)’로 표기되어 있다.
[주D-010]소잔오존(素盞烏尊) : 일본의 신화 속에 나오는 인물로, 일본의 신화에 의하면 최초에 하늘이 있었고 땅은 혼돈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국상립존(國常立尊)을 비롯한 신세(神世) 7대의 신이 생겨났고, 최후에 이장약존(伊奘若尊), 이장염존(伊奘冉尊)이 국토를 낳았으며, 일신(日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월신(月神), 소잔오존을 낳았는바, 그 뒤에 소잔오존에 의하여 여러 가지 신화가 전개되며, 천조대신의 자손이 강원(橿原)에서 즉위하여 제1대 신무천황(神武天皇)이 되었다고 한다.
[주D-011]납소리(納蘇利) : 고구려의 음악 가운데 하나로, 두 사람이 추는 춤이다.《악가록(樂家錄)》 권28 악곡훈법(樂曲訓法)에, “고구려의 악곡이다. 고구려 일월조(壹越調)의 납소리는 일명 낙준(落蹲)이라고 하며, 또 쌍룡무(雙龍舞)라고도 한다.” 하였다.
[주D-012]탁금신라국(柝衾新羅國) : 《일본서기》 권8에는 고금신라국(栲衾新羅國)으로 되어 있다. 고(栲) 즉 다구는 우리말인 ‘tak’에서 온 것이다. 고금(栲衾)이나 탁금(柝衾)은 신라의 침사(枕詞), 즉 신라를 쓸 적에는 으레 앞에 붙이는 말이다.《완역일본서기 146쪽 주》
[주D-013]무내숙녜(武內宿禰) : 《고사기》에는 ‘건내숙녜(建內宿禰)’로 표기되어 있다.
[주D-014]악포(鰐浦) : 《일본서기》 권9에는 ‘화이진(和珥津) 즉 와니노츠’로 되어 있다. 지금의 대마도에 있는 포구(浦口)이다.
[주D-015]사부(飼部) : 말의 사육을 담당하는 부서로, 항복하여 비천한 일을 하겠다는 뜻이다.
[주D-016]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 : 낙동강(洛東江)이나 알천(閼川)이라는 설이 있으나, 반드시 고유명사로는 보이지 않고 대하(大河), 대수(大水)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27쪽 주》
[주D-017]파사매금(波沙寐錦) : 매금은 신라 왕에 대한 호칭으로,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이나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에도 보이는데, 이사금(尼師今)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 용어인 듯하다. 파사는 신라 제5대 왕인 파사(婆沙)를 가리키는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27쪽 주》
[주D-018]미질이지파진간기(微叱已知波珍干歧) : 원문에는 ‘徵叱已知波珍干歧’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19]예전존(譽田尊) : 일본의 제15대 천왕인 응신천황(應神天皇)을 가리킨다.《완역일본서기 170쪽》
[주D-020]탁순(卓淳) : 원문에는 ‘卓浮’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권9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목라근자(木羅斤資) : 목라는 목리(木刕)라고도 표기한다. 백제의 저명한 성(姓)이다.
[주D-022]비자발(比自㶱) …… 가라(加羅) : 7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국내에 비정(比定)하는 설과 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歧島), 구주(九州) 지방의 섬에 비정하는 설이 있는데, 각 학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국명 \ 학자말송보화(末松保和)금서룡(今西龍)김성호(金聖昊)이병선(李炳銑)
비자발창녕(昌寧)창녕창녕비전승(比田勝)
남가라김해(金海)김해김해당주(唐洲)
탁국경산(慶山)대구(大邱)창원(昌原)하도(下島)
안라함안(咸安)함안함안
다라합천(陜川)진주(晉州)사천(泗川)
탁순대구창원남해(南海)
가라고령(高靈)고령광양


[주D-023]고해진(古奚津) : 주정개장(酒井改藏)은 섬진강(蟾津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하동군(河東郡)의 고포(高浦)로, 이병선은 제주도의 어느 나루로 비정하였다.
[주D-024]침미다례(忱彌多禮) : 탐라(耽羅)로, 제주도를 가리킨다.
[주D-025]비리(比利) …… 반고(半古) : 비리는 전주(全州), 벽중은 김제(金堤)나 임실(任實), 포미지는 공주(公州)나 순창(淳滄), 반고는 나주(羅州)나 구례(求禮)로 비정한다. 포미지는 원문에 포미우(布彌友)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6]다사성(多沙城) : 섬진강 하구에 있는 하동(河東)과 악양(岳陽)으로 비정된다.《古代韓日文化交流硏究 215쪽》
[주D-027]우례사벌(汙禮斯伐) : 《일본서기》의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과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5에 나오는 석우로(昔于老)에 해당된다. 석우로는 신라 제10대왕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의 아들로, 17관등 가운데 1등인 서불한(舒弗邯)의 지위에 있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28쪽 주》
[주D-028]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 《삼국사기》 권45 박제상전(朴堤上傳)에 ‘혹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한다.’ 하였는바, 박제상을 가리킨다. 박제상을 《삼국사기》에서는 박제상이라 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김제상(金堤上)이라 하였는데, 박씨나 혹은 김씨의 성을 붙인 것은 후대에 붙인 것이고 본래는 제상(堤上)이다. 실성왕(實聖王) 원년에 왜와 강화하기 위하여 내물왕(奈勿王)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냈는데, 박제상은 이를 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갔다.《古代韓日文化交流硏究 219쪽》
[주D-029]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 : 미사흔을 가리킨다.
[주D-030]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 : 갈성은 씨족명(氏族名)으로, 대화(大和) 갈성(葛城) 지역의 호족(豪族)이다.
[주D-031]조해(鉏海) : 대마도의 북단에 있는 악포(鰐浦), 즉 화이진(和珥津)을 가리키며, 그 근처의 바다를 조해로 본다는 견해도 있다.《완역일본서기 161쪽 주》
[주D-032]도비진(蹈鞴津) : 타타라노쯔로, 타타라는 제철용 풀무를 가리킨다. 부산의 다대포(多大浦)인 듯하다.《완역일본서기 161쪽 주》
[주D-033]초라성(草羅城) : 양산(梁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비정하고 있으며, 막연히 신라 방면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28쪽 주》
[주D-034]아직기(阿直歧) : 《고사기》에는 “백제의 국주(國主) 조고왕(照古王)이 암말 1필과 수말 1필을 아지길사(阿知吉師)에게 주어 바치게 하였다.” 하여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일본으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은 아직기사(阿直歧史) 씨족의 시조가 되었다.
[주D-035]토도아랑자(菟道雅郞子) :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로 표기되기도 한다. 아직기와 왕인에게서 유학을 배웠으며, 응신 14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뒤에 자살하였다.
[주D-036]감라성(甘羅城), 고난성(高難城), 이림성(爾林城) : 감라성은 함열(咸悅), 고난성은 곡성(谷城), 이림성은 김제(金堤)나 대흥(大興)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이병선(李炳銑)은 이를 비자발(比自㶱) 즉 대마도의 비전승(比田勝) 등 7국의 부근으로 비정하여 감라(甘羅)는 금(琴)이고, 고난(高難)은 소록(小鹿)의 흑외(黑隈)이고, 이림(爾林)은 인위(仁位)에 가까운 쪽이라고 보았다.《완역일본서기 177쪽》
[주D-037]목토숙녜(木菟宿禰) : 원문에는 ‘木菟宿旃’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8]목만치(木滿致) :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蓋鹵王) 21년 조에 나오는 목협만치(木劦滿致)와 동일인으로 보인다. 목려는 목협(木劦)의 오기이며, 목라(木羅)나 혹은 목(木)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39]의납둔창(依納屯倉) : 《일본서기》 권11 인덕천황에는 ‘의망둔창(依網屯倉)’으로 되어 있다.
[주D-040]수류지(須流枳)와 노류지(奴流枳) : 이들은 숙피(熟皮), 즉 피혁을 다루는 기술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475쪽》
[주D-041]희씨(姬氏) : 해씨(解氏)를 잘못 표기한 것이다. 희씨는 주(周)나라 왕실의 성이고, 해씨는 백제의 팔대성(八大姓) 가운데 하나이다.《완역일본서기 336쪽 주》
[주D-042]기압승(紀押勝) : 기국조압승(紀國造押勝)을 가리킨다.
[주D-043]사공(寺工) : 사찰 건축을 담당하는 기술자이다.
[주D-044]백여(白如) : 《일본서기》 권21에는 ‘백가(白加)’로 되어 있다.
[주D-045]2년 : 원문에는 ‘元年’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6]왕진(王陳) : 《일본서기》 권22에는 ‘옥진(玉陳)’으로 되어 있다.
[주D-047]진야신제자(眞野臣弟子) : 《일본서기》 권22에는 ‘진야수제자(眞野首弟子)’로 되어 있다.
[주D-048]포석(抛石) : 돌을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도록 만든 무기이다.
[주D-049]삼론(三論) : 삼론종(三論宗)을 말한다. 삼론종은 대승 불교(大乘佛敎)의 공사상(空思想)을 중심으로 한 불교 종파의 하나로,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순도(順道)가 이 종파에 속하였으므로 일찍부터 고구려에서 발달하여 낭대사(郞大師) 등 고승이 배출되었으며, 혜관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
[주D-050]풍장(豐章) : 《삼국사기》와 《신당서》 백제열전(百濟列傳)에는 ‘풍(豐)’으로 되어 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하고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주류성(周留城)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고는 당시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夫餘豐)을 옹립하여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부여풍은 그 뒤 복신을 살해하고 병권을 잡았으나, 연합군에 의해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하였다가, 고구려가 망할 때 당나라 군사에게 잡혀가 당나라의 오령(五嶺) 남쪽으로 귀양 갔다.
[주D-051]2년 : 원문에는 ‘四年’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2]귀실복신(鬼室福信) : 복신(福信)을 가리킨다. 복신은 의자왕의 종제(從弟)로,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豐)을 영립하여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내분이 일어나 풍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주D-053]임존성(任存城) :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禮山郡) 봉수산(鳳守山)에 있던 백제의 성 이름이다. 한산의 주류성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으나, 그 운동이 실패한 뒤 신라 경덕왕 때 임성군(任城郡)이 되었다.
[주D-054]구지하성(久知下城) :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長城)이다.《이병도, 국역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563쪽 주》
[주D-055]사탁(沙啄) : 백제의 동쪽 지방에 있는 지명이다.
[주D-056]규해(糺解) : 부여풍(夫餘豐)을 가리킨다.
[주D-057]가파리빈(加巴利濱) : 거제도(巨濟島)의 옛 이름인 ‘가비이[裳]’로, 지금도 가배달[加背梁]이 남아 있다.《완역일본서기 486쪽 주》
[주D-058]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 이름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국역삼국사기 429쪽 주》
[주D-059]사비(沙鼻), 기노강(歧奴江) : 사비기(沙鼻歧), 노강(奴江)으로 보는 설도 있다. 사비기는 무주(茂朱)의 옛 이름인 삽계[朱溪], 노강은 무주 동쪽의 눈나리[雪川]로 보기도 한다.《완역일본서기 489쪽 주》
[주D-060]백촌강(白村江) : 《당서》에는 백강(白江), 《삼국사기》에는 기벌포(伎伐浦)로 되어 있다. 강경(江景) 근처의 금강(錦江)이라는 설과 변산반도(邊山半島) 남쪽의 줄포만(茁浦灣)이라는 설이 있다.
[주D-061]저례성(氐禮城) : 화순(和順)의 옛 이름인 오성(烏城)이라는 설과 보성군(寶城郡) 해안의 득량(得糧)이라는 설이 있다.
[주D-062]현종(玄宗) : 원문에는 ‘元宗’으로 되어 있는데, 개원(開元)은 현종 때의 연호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63]천명개별천황(天命開別天皇) : 천지천황(天智天皇)을 가리킨다.
[주D-064]천지진보풍조부천황(天之眞寶豐祖父天皇) : 문무천황(文武天皇)을 가리킨다.
[주D-065]천평(天平) : 원문에는 ‘天兵’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의 연호에 천병이란 연호가 없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66]곤륜국(崑崙國) : 중국의 남해(南海)에 있는 나라들의 범칭(泛稱)으로, 중국의 광동성에서부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까지를 포함한다.
[주D-067]기장족원황태후(氣長足媛皇太后) : 신공황후(神功皇后)를 가리킨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 9년 9월에 신라를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68]김승경(金承慶) : 신라 제34대 왕인 효성왕(孝成王)의 이름이다.
[주D-069]김헌영(金憲英) :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景德王)의 이름이다. 경덕왕의 훙년(薨年)에 대해서는 765년이라는 설과 766년이라는 설이 있다.
[주D-070]자수대부(紫綬大夫) : 원문에는 ‘紫授大夫’로 되어 있는데, 잘못되었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71]왕신복(王新福) : 원문에는 ‘王信福’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되었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72]사조의(史朝義) : 사사명(史思明)의 아들로,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가 피살되었다.
[주D-073]등원청하(藤原淸河) : 등원하청(藤原河淸)이 개명(改名)한 이름이다. 등원하청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중 표류하여 안남(安南)에 도착하였고, 다시 당나라로 들어가 있다가 후당(後唐) 때 개명하였다.
[주D-074]포길(包桔) : 당나라 때 사람인 포길(包佶)을 잘못 표기한 듯하다.
[주D-075]음찬(蔭湌) : 살찬(薩湌)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살찬은 사찬(沙湌)으로, 17관등 가운데 8위의 관등이다.
[주D-076]해상삼수(海上三狩) : 이때 당나라로 가다가 제주도에 표류하였다.《국역삼국사기 161쪽 주》
[주D-077]철리(鐵利) : 부족의 이름이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여러 부족 가운데 한 부족으로, 뒤에 발해에 복속되었으며, 연해주(沿海州) 일대를 근거로 하였다.
[주D-078]선명력(宣明曆) : 당나라 목종(穆宗) 장경(長慶) 2년(822)에 서앙(徐昻) 등이 제작한 것이다. 《대연력(大衍曆)》을 기초로 해서 만든 것으로, 일식(日蝕)의 추산(推算)에 있어서 태음시차(太陰時差)를 가(加)하는 특색을 가졌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1276쪽》
[주D-079]희종(僖宗) : 원문에는 덕종(德宗)으로 되어 있는데, 중화(中和)는 희종 때의 연호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80]25일에 …… 있었다 :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바, 오자(誤字)가 있는 듯하다.
[주D-081]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馬山)에 있는 지명으로, 일명 환주(還珠)라고도 한다.
[주D-082]거기(筥崎) : 상기(箱岐)를 잘못 표기한 듯하다. 《일본역사대사전(日本歷史大辭典》에 있는 ‘상기’로 되어 있다.
[주D-083]금진(今津) : 단후국(丹後國)의 지명이다.
[주D-084]만군(蠻軍) : 남송(南宋) 지역에서 모집한 한군(漢軍)을 가리킨다.
[주D-085]홍다구(洪茶邱)와 …… 거느리고 : 《동사강목(東史綱目)》 권12 상에는 흔도(忻都)가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를 출발하였다고 하였다.
[주D-086]관응(觀應) : 원문에는 ‘觀德’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의 연호에 관덕이란 연호가 없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87]안길상(安吉常) : 안길상(安吉祥)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1